오랜 세월 흘러 다시 불러도 생각나는 그 노래 ‘동요’

▲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도’라는 섬에 가면 동요 가사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동요 ‘섬집아기’를 그려놓은 벽화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우산 깜장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어린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자주 부르곤 했던 동요다. 누구나 한 번쯤은 불렀음직한 이 동요는 시간이 지나면서 ‘깜장우산’인지 ‘빨강우산’인지 헷갈리기 시작하고 점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갔다. 아니 지워졌다기보다는 부를 일이 거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우리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으며, 세월이 지나 우리를 똑 닮은 2세가 태어나 자라면서 또 다시 부르게 될 노래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도’라는 섬에 가면 동요 가사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동요 ‘섬집아기’를 그려놓은 벽화 ⓒ천지일보(뉴스천지)

동요는 보통 어린이들이 부르지만 동요를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어른들이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우리의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다.

아기가 태어나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 몇 마디를 옹알거리다가 한글을 익히게 되고 노랫말을 처음 배우게 되면서 접하게 되는 노래가 바로 ‘동요’다. 지금이야, 아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영어를 가르친다고 야단이지만 기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단연 ‘동요’의 전성시대였다.

틈만 나면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를 불렀고, 설날만 되면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를 불렀다. 비만 오면 ‘파란우산, 깜장우산, 찢어진 우산’을 흥얼거렸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 때는 멍멍 바둑이도 함께 돌아야 하는 줄 알았다. 동요 ‘다 함께 돌자 동네 한 바퀴’의 영향 탓이다.

오랜 세월 잊고 살다가도 몇 번 흥얼거리다보면 신기하게도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나는 노래이자 다시 들어도 즐거운 노래, 동요가 가진 힘이다.

세상사에 젖어 순수했던 시절을 잊고 사는,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동요는 오랜 벗이자 삶의 비타민 같은 존재다. 그렇기에 동요는 단지 어린이만을 위한 노래가 아닌,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불러 기분 좋은 노래이자, 세상을 밝고 긍정적이게 만드는 희망의 노래이다.

▲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도’라는 섬에 가면 동요 가사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동요 ‘섬집아기’를 그려놓은 벽화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강점기, 식민의 설움을 달래다

동요의 겉모습은 밝고 긍정적일지 몰라도 그 내면은 슬픔과 설움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족이지만 아이들만큼은 식민지 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북간도 명동촌에서 자란 민족시인 윤동주가 식민의 설움을 시(詩)로써 달래줬다면, 작곡가 윤극영은 동요로 그 역할을 대신했다.

앞서 언급했던 ‘반달’과 ‘까치 까치 설날은’이 그의 대표작이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이 제정되면서 창작동요의 필요성이 윤극영 선생에 의해 제창됐으나 우리의 동요와 애국창가는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취급돼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었다.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을 비롯한 윤석중·윤극영 선생 등은 우리네 아이들이 일본 동요를 따라 부르는 것에 분개하고 마음 아파하며, 무수히 많은 창작 동요를 만들었다.

비록 식민의 설움을 받고는 있지만 우리의 아이들만큼은 밝고 건강하게 자라 민족의 뿌리를 찾고,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가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어른들의 노력은 1920년대 기점으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요의 황금시대를 만들었다. 1926년 최초의 개인 작곡집을 발표한 윤극영 선생에 이어 1931년과 32년에는 홍난파 선생이 ‘조선동요 100곡집’을 출판했으며, 윤석중 선생 또한 1932년 첫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후 다수의 어린이 잡지가 등장하면서 아동 문학인들의 창작 동요가 실리게 됐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1930년대 우리의 동요가 황금기를 맞게 된 데에는 기독교 주일학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다. 어린이 성가대를 통해 어린이 찬송가뿐 아니라 우리의 동요를 배우고 부를 수 있게 됐고, 이는 동요 보급의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백은영 기자]

▲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도’라는 섬에 가면 동요 가사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동요 ‘섬집아기’를 그려놓은 벽화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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