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6년 만의 남북 고위급 회담이 무산되었다. 혹시나 2007년 이후 첫 장관급 회담이 열리나 싶었는데, 명칭도 애매한 ‘당국회담’으로 바뀌더니 수석대표의 격(格)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그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 판국에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회담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사자들의 진정성이 없으면 알맹이도 없기 마련이다. 그러니 회담도 하기 전에 껍데기만 놓고 다투다가 판이 깨지기 일쑤인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번의 남북 대화는 양측 모두 진정성이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먼저 우리 측은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첫 단추를 꿰는 일이었다. 앞으로 5년간 펼쳐질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 성패가 달려있는 셈이다. 진정성 없이는 첫 단추를 잘 꿸 수 없는 노릇이다. 북측도 예외가 아니다. 한-미, 미-중, 그리고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확실하게 대화국면이 조성되는 시점에서 북한인들 고립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참에 남북대화를 지렛대로 삼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도 해소하고 대북지원도 받을 수 있다면 일거양득인 셈이다. 더욱이 남북대화가 북미대화로 가는 길목이라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으니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가 남남갈등을 부추기나?

이처럼 남북 모두 어느 정도의 진정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석대표의 격을 이유로 당국회담이 무산됐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그저 사진이나 찍고 보겠다는 식의 쇼가 아니었으니 당국회담 무산의 원인은 꼼꼼히 짚어볼 대목이다. 후일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무슨 이유인지를 전략적으로 검토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판을 주도하겠다면 최소한 상대의 의중을 분석하고 그에 맞은 대책을 세우는 것이 기본이다. 박근혜정부도 첫 남북대화에 임하면서 이 정도의 인식은 충분히 공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국회담이 무산된 직후 터져 나오는 당‧정‧청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큰 실망이 앞선다. 청와대는 당국회담 무산의 원인을 남북 모두에게 지우는 ‘양비론’은 북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의 실책을 비판하면 그것이 곧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북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인가. 이런 자세로 당국회담에 임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심지어 지난 21차례의 ‘남북장관급회담’을 우리 쪽이 굴욕, 굴종한 것이고 그래서 진실성이 없다고 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격’을 따지고 원칙을 바로잡겠다는 얘기다. 아무리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 성과가 중요하더라도 역대 정부의 성과마저 굴욕이니 굴종이니 하면서 진실성이 없다고 폄하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역대 통일부 장관들을 이렇게 모욕해도 좋은 것인가. 이것이 국민대통합을 지향하는 박근혜정부의 원칙인지 묻고 싶다.

또 있다. 말을 아끼던 정홍원 총리도 거들었다. 정 총리도 지금까지의 남북대화는 우리 정부가 무한대로 양보했으며,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대화라서 진실성이 없다고 했다. 일이 잘 됐으면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상봉 등을 논의하고 있을 12일 오전, 정 총리는 국회에서 과거의 남북대화를 역시 굴욕이라고 말하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성과를 깡그리 짓밟아 버렸다. 그 내용이 옳고 그름을 넘어 과연 이런 언행이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인지, 그리고 일국의 총리로서 국민대통합에 부합하는 발언인지 짚어볼 대목이다. 이쯤 되면 더 궁금해진다. 정말 잘되기를 바랐던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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