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의 팅팅톡톡 한국사 이야기

▲ 병인양요. 미국의 포함외교

▶ (상)편에 이어서

◆신미양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2달 전인 1866년 8월 20일(음 7.11)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면제품과 유리 등을 싣고 중국 천진으로부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했다. 이 배는 영국의 메도우즈 상사(Meadows and Company)가 빌린 미국 국적의 배로 선주 프레스턴(W. B. Preston) 등 미국인 3명, 통역을 담당한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등 영국인 2명, 중국인 13명, 흑인 2명 등 총 20명이 타고 있었다. 토머스는 중국에 파견된 영국 웰스선교부의 선교사로 조선 선교의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한 해 전에도 조선 해안에 와서 2달 반 동안 머무르며 조선의 문물을 접하고 말을 배운 적이 있었던 그는 강변에서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조선 관리들은 통상을 거부하며 즉각 물러가기를 요구했다. 8월 25일 선원들이 대화를 위해 배위에 올라온 조선 관리 이현익과 두 부하를 인질로 잡아 감금하고 연안에 포격을 가해 민간인 7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이를 보고 공격 명령을 내렸고 평양 군민들이 모래톱에 얹혀 움직이지 못하는 이 배를 불태워버렸다.

▲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 작전회의. 로저스는 조선 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적으로 통상조약을 맺기로 계획했다.

이 사실은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국은 1차로 와추세트(Wachushett)호 함장 슈펠트(Robert W. Shufeldt)로 하여금 진상조사를 한 후, 포함외교로 조선을 개항시키기로 작정하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가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으로 1871년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 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적으로 통상조약을 맺기로 계획했다.

1871년 6월 1일 로저스 미국 함대는 인천 앞바다에 와서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강화해협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는 미국 함선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손돌목 포격사건).

미국 대표는 조선 측에게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을 비난하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 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고,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 측은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 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 미국은 조선과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포병대·공병대·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포함해 10개 중대로 상륙군 부대를 편성,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6월 11일 덕진진을 점거, 이어서 광성보를 점령했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포병대·공병대·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포함하여 10개 중대로 상륙군 부대를 편성하고,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을, 6월 11일에는 덕진진을 점거하였다. 이어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는 광성보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수륙 양면에서 포격하여 광성보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는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으나,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 난 결사적인 항전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조선군의 결사항전과 조선정부의 통상거부로 인해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7월 3일(음 5.16)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 미국은 조선과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포병대·공병대·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포함해 10개 중대로 상륙군 부대를 편성,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6월 11일 덕진진을 점거, 이어서 광성보를 점령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군사적 정면충돌을 빚은 프랑스와 미국의 포함외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앞에서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이때의 프랑스나 미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개항을 요구했다. 조선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침략자를 격퇴했다고 자부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대외고립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세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시간을 놓치게 되었다.

▲ 척화비.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의 승리 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대외고립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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