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문화·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평화운동 펼칠 수 있다. 세계는 지금 평화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때로는 인종 때문에, 때로는 종교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전쟁이 종식되어야 한다. 또한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인 한반도의 통일이 선행돼야 한다. 여기 세계 평화를 위해 반전(反戰)과 평화의 목소리를 내는 우리 시대 평화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비틀즈의 리드 보컬 ‘존 레논(Joh nLennon)의 아내 오노 요코(小野洋子, Ono Yoko)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오노 요코 존 레논, 퍼포먼스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 전달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그룹 ‘비틀즈(The Beatles)’. 그리고 비틀즈의 리드 보컬 ‘존 레논(Joh nLennon)의 아내’로 잘 알려진 오노 요코(小野洋子, Ono Yoko). 전위예술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요코가 존 레논과 결혼할 당시, 사람들은 존 레논을 이용해 유명해지려 한다고 수군거렸다. 그동안 주로 혼자서 퍼포먼스를 해왔던 그녀는 결혼한 뒤 존레논과 함께 공동 작업을 펼치면서 유명세를 탔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3월 20일 결혼한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전 세계가 주목할 자신들의 결혼을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이용하기로 한다. 이들은 암스테르담의 힐튼호텔에 기자들을 초대해 침대 위에서 3일간 인터뷰에 답하며 전 세계에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베드 인(Bed in)’이라는 퍼포먼스다. 이들의 예상대로 ‘베드 인’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들의 사진은 전 세계 신문을 장식했다.

요코와 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작품(퍼포먼스)이 2인 시위 형식을 띤 정치적 성명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들을 취재했던 기자들은 <베드 인>이라는 제목만을 보고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눌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들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이들이 퍼포먼스를 통해 전하고자 한 것은 바로 ‘평화’였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두 사람의 퍼포먼스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빠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전 세계에 평화의 울림을 안겨줬다.

당시 이들의 퍼포먼스를 두고 비판적인 여론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오노 요코와 존레논, 두 사람이 추구한 것은 세간의 관심이 아닌 ‘사랑과 평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던 젊은 부부는 1980년 12월 8일 밤 이별을 맞게 된다. 존 레논이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존 레논의 광팬이라는 마크 채프먼은 ‘존 레논을 죽이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존 레논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을 생각하면,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던 그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일각의 목소리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UN 평화사절단’ 조지 클루니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UN 평화사절단’ 조지 클루니,
수단의 평화를 돕다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George Timothy Clooney)’. 할리우드의 바람둥이로 통했던 그가 요즘에는 평화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유엔 평화사절단으로 임명되기도 했던 조지 클루니가 관심을 갖는 곳은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수단이다.

조지 클루니는 2006년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다르푸르에서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며, 2007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다르푸르 나우’에 출연해 다르푸르 사태의 심각성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그는 2010년 10월, 8박 9일 일정으로 수단을 직접 방문해 현지 상황을 살펴본 후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수단 방문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으며, 수단의 평화를 위해 미(美)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2011년 1월 초, 그는 미국 일요시사프로그램인 abc방송의 ‘디스 위크(this week)’에 직접 출연해 수단 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량학살이나 다른 전쟁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그리고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해주고 싶다.”

아프리카의 내전이 끝나고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조지 클루니. 그는 2007년 인권단체인 ‘낫 온 아워 워치(Not On Our Watch)’를 설립해 다르푸르 난민 등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치는 한편, 아프리카 수단의 평화를 위해 앞장서는 등 현재까지 아프리카의 평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 노벨평화상 수상,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출처: 김대중기념사업회)

노벨평화상 수상, 김대중 전 대통령
‘한반도 통일을 꿈꾸다’

2000년 10월 13일.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노벨상 위원회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의 입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이 불려졌다. 노벨상 제정 100년 만에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해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40여 년에 걸친 긴 투쟁과 역정, 6·15 남북 공동선언을 이끌어내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한 공로를 국제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노벨위원회 위원장 군나르 베르게는 선정 이유에 대해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및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에 기여했다”며 “한국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권위주의 체제 속에 계속된 생명의 위협과 기나긴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 대변자였다. 그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올랐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은 민주 정부 체제를 공고히 했고, 한국 내의 화합을 도모했다”고 밝혔다. 분명 한국인 모두의 경사가 될 감격적인 소식임에도 당시 국내 야당과 보수언론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김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두고 로비가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노벨위원회 위원장 군나르 베르게가 별도의 해명을 하게 됐고, 그의 해명은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고 로비가 있다면 더 엄정하게 심사한다. 기이하게도 김대중에게는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 김대중의 수상을 반대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한국에서 날아왔다. 그것이 모두 특정지역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민족, 그 민족이 하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펼쳐온 햇볕정책이 모든 이의 마음에 들 수는 없을 터다. 동포가, 한 민족이 둘로 갈라진 것도 서러운 일이건만, 이 조그만 땅 덩어리에서 또 지역끼리 갈라져 갈등을 빚어야만 하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같은 민족이 시대의 비극을 이기고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생을 바쳤다.

이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과 노벨상 수상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높였고,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국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김 전 대통령의 평화 사상을 기리기 위해 2013년 6월 전남 목포시 삼학도에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개관된다.

[백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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