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간 시묘살이한 황구, 주인 제삿날에 목숨 끊어

▲ 허석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얼마 전 동네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얼핏 보기에도 여든은 훌쩍 넘어 보이는 노인장이 들어오셨다. 지팡이를 짚고 오시는 모양새가 거동이 많이 불편해 보인다.

그때였다. 목욕탕에서 일하시는 분이 느닷없이 화를 냈다. 보호자 없이는 오지 말라는데 왜 또 왔냐는 것이다. 불현듯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나 언젠가 어느 이름 모를 목욕탕에서 저렇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 노인장이 힘없이 항변하자 다른 목욕탕으로 가란다. 다른 목욕탕에서도 안 받아준다니 “그럼 집에서 하든가!”한다. 반말투다. 젊어서 탱탱했을 그 육신에는 그늘진 주름뿐이다. 형형했을 그 눈빛은 어디 가고, 말 한 마디 못하고 쫓겨나시는 그 눈가에는 회한만이 남아 있다. 텅 빈 근육의 슬픔, 자식을 위해 내어준 살들의 처절함. 내가 그 빈자리요, 우리가 그 빈자리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이의 부모에게 잘하기는커녕 자신의 부모에게조차 도리를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순천시 별량면에 있는 쌍효문(雙孝門)과 남문 밖에 있었다는 의구비(義狗碑)는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순천시 별량면 우산리에는 율봉서원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쌍효문은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의 후예 정효원과 그의 부인 창녕 성씨의 행적을 모신 것이다. 조선 영조 때 사람인 정효원은 과거에 합격한 후 오위장(정3품 장수)을 지냈다. 효심이 깊었던 효원은 외직에 나가 있으면서도 항시 부모님 걱정을 했다. 그래서 항시 고향 근처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다.

어느 날 무안으로 발령을 받자 연로하신 부모를 걱정해 벼슬을 내놓을 생각을 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께 여쭈었으나 돌아온 것은 불호령이었다. 어쩔 수 없이 무안으로 떠나기 전, 효원은 친구로부터 황구(黃狗)를 선사받아 부모님께 바쳤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님께 황구라도 벗이 되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1820년 2월 28일, 느닷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왔다. 그러자 효원은 즉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상을 치른 뒤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황구 역시 마치 시묘를 하듯 꼼짝을 않는 것이다. 어느 날 효원에게 이웃에서 고기 요리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효원은 부모를 보낸 죄인이라며 입에도 대지 않고 황구에게 던져줬다. 그런데 황구 역시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이 아닌가.

3년 동안의 시묘가 끝나고도 효원은 아버지 초상을 모셔놓고 산 사람에게 하듯 3년 동안 하루 세 끼 밥을 차려드렸다. 그때마다 부부가 꿇어 엎드려 울었는데 황구 역시 마루 밑에 엎드려 울었다 한다. 그러던 차에 효원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역시 효원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다시 3년 동안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중당에 어머니 초상을 걸고 상식(上食)을 하였는데, 황구 역시 그렇게 했다.

2월 28일, 여느 해처럼 아버지 제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차에 식솔이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황구가 마루 댓돌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렸다. 무려 12년 동안 효원을 따라 시묘와 상식을 하던 황구가 주인의 제삿날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순천 사람들은 남문 밖에 의구비를 세우고 개만도 못한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이 비는 아쉽게도 일제강점기에 남문이 뜯기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 순천시 별량면 우산리에 있는 율봉서원, 오른쪽이 정효원과 그의 부인 창녕 성씨의 행적을 기리는 쌍효문(사진제공: 한국설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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