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필자의 책상 위에는 안철수 의원도 읽었다고 했던 최장집 교수의 그 책,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라는 얇고 읽기 쉬운 책 한 권이 놓여있다. 최근 최 교수의 ‘노동 중심의 정당론’에 대한 발언이 관심을 끌면서 필자도 이 책을 다시 꺼내 꼼꼼히 훑어보던 참이다. 일흔의 노학자가 발로 뛰면서 쓴 한국정치에 대한 고민과 질타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히 ‘노동의 몰락’에 대한 그의 집요한 문제의식과 민주화 이후 여전히 목마른 한국정치에 대한 고언(苦言)은 후학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가르침으로 들린다.

‘이념’으로서의 노동과 ‘일상’으로서의 노동

최장집 교수가 며칠 전 한 노동단체 강연에서 언급한 내용이 관심을 끌고 있다. 최 교수는 “안철수 의원의 정치조직화든 활동이든 이런 것에서 노동 문제가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당보다는 분명히 진보적인 스탠스를 갖는 정당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압축하면 최 교수는 ‘노동 중심성’과 ‘진보성’을 신당 창당의 중요한 가치로 제시한 셈이다. 사실 이 두 개의 키워드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래서 깜짝 놀란 안철수 의원 측의 일부 인사들은 최 교수 개인 의견으로 방어막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안 의원은 “노동 문제가 중요한 정치의제가 돼야 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이라면서 최 교수의 발언에 힘을 실었다. 이로써 안철수 의원 측의 입장은 정리가 된 셈이지만 사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뜨거운 논쟁을 벌여야 한다. ‘새 정치’는 그런 치열한 고민과 현장의 절박함을 무기로 삼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고민하고 부딪히면서 ‘낡은 것’을 깨뜨려가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노동 중심성이란 것이 무엇이며, 진보의 프레임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그 일단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앞서 말한 그의 책에서 볼 수 있다. 최 교수는 서문에서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동의 위기는 곧 한국경제, 한국민주주의, 한국사회 모두의 위기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최 교수의 노동은 이념적, 계급적인 것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일상’으로서의 노동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조직화된 노동자도 중요하지만 동네 편의점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들의 노동도 정치의제가 돼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그의 노동 중심성은 곧 정치영역에 노동을 부활시키는 아젠다인 셈이다. 새누리당이 외면하고 민주당은 망각해 버린 일상으로서의 노동, 최 교수는 그런 노동을 정치 테이블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싶은 것은 아닐까. 최소한 이 점에서는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면 딜레마가 된다.

이념적인 지평에서 민주당보다 더 왼쪽으로 간다면 안철수 신당도 이념적인 진영 싸움에 골몰해야 한다.
 
이는 ‘새 정치’를 표방한 안철수 의원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전략적으로도 오판이다. 안철수 신당이 민주당과의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핵심 지지층인 중도세력을 잃게 돼 결국 새누리당과의 전쟁에서는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이 진보성을 강조한 최 교수의 딜레마이다. 따라서 안철수의 진보성은 왼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뛰어 넘는 진보성이어야 한다. 그것은 최장집 교수마저 뛰어 넘어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