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의 왕 ‘후추’ 세계를 재편하다 (下)
향신료의 왕 ‘후추’ 세계를 재편하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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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주열매


▶ (上) 편에 이어서

◆식재료 의약품 방부제 등 다양한 얼굴의 ‘후추’

향신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800년에 쓰인 이집트의 파피루스 기록과 기원전 2200년경의 수메르의 점토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허브와 몰약, 유황, 육계, 계피 등과 같은 향신료를 사용했으며, 제의용으로 많이 쓰였다. 당시 향신료는 종교의식 때 향불을 피우는 데 사용했다. 고대 사람들은 향신료가 인간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집트에서 후추는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1224년에 죽은 람세스 2세의 코에서 사망 후에 넣어둔 여러 개의 후추 열매가 발견되면서 후추가 방부제로 쓰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람세스 이후로는 사람이 죽으면 향료를 넣은 무덤에 묻었다. 565년 비잔틴제국의 시인 코리푸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시신을 향유, 몰약, 꿀로 방부 처리한 다음 100여 가지의 향료와 불가사의한 연고를 그 안에 넣어 황제의 신성한 시신을 영구히 보존했다’고 기록했다.

▲ 후추

후추는 1세기의 로마인, 13세기의 중국인, 16세기의 유럽인 등 긴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인도로 향하게 했다. 페르시아를 통해 지중해로 전해진 후추는 기원전 4세기경 의약품으로 쓰였으며, 로마인들에 의해 양념으로써의 진가를 발휘했다. 특히 로마인들은 거의 모든 요리에 후추를 넣어서 먹을 정도로 후추에 열광했으며, 그 사용량도 어마어마했다.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 “아주 적게 잡아도 인도, 중국 그리고 아랍이 우리 제국으로부터 빼가는 돈이 1년에 1억 세스테리우스(고대 로마의 은화)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후추 열풍은 로마의 쇠퇴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되고,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제국을 중심으로 양념으로 정착해 나가게 된다.

후추는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전해진다. 중국 <후한서>에는 “서방의 이란인들이 전했다는 뜻을 담은 ‘호(胡)’에, 매운맛이 있는 과실이라는 뜻의 ‘초(椒)’가 합쳐진 ‘호초’”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후추의 효능을 설명한 <신수본초(新修本草)>에는 음식을 조리하는 데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소화를 돕고 설사를 치료하는 데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후추와 돼지’ 이야기 장면

중국은 인도의 말라바르 지방까지 진출해 후추를 수입했지만 급속하게 증대된 수요를 충족시키기 힘들었다. 7세기경 중국은 인도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후추가 재배되고 있는 자바에 눈을 돌리게 되고, 자바와의 후추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상인들이 동전을 대량으로 수출해 동전부족 현상이 빚어졌다. 이에 중국 정부는 후추 무역을 금지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후추의 향미는 조선 사람들도 사로잡았다. 후추는 통일신라때까지도 귀한 식품이었으며, 고려시대에 오면서 후추 수입이 늘어났다. <고려사>에는 1389년 유구국(琉球國)에서 후추 300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조선의 성종은 후추 씨앗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후추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컸기 때문에 후추 소비량이 큰 중국에 후추를 직접 생산해 팔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후추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후추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의약품, 제의용, 방부제 등 고대부터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으며, 그 몸값도 금이나 노예 1명과 맞먹을 정도로 높았다. 또한 후추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에 각국에서는 후추를 차지하기 위한 열정에 불타올랐고, 그 열정과 욕망은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켰다.

[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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