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매주 월ㆍ화요일에 식생활문화연구가인 김영복 선생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의 맛, 우리의 전통음식을 소개합니다.

포작이 노고로 잡아올린 ‘전복’

▲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바닷 속 깊이 들어가 전복이나 소라 고동을 따는 남자를 일컬어 ‘포작이’라 하고, 제주 방언으로는 ‘보재기’라고도 한다. 17세기 이전 나라에 공물(貢物)로 바치는 전복은 남자인 포작이(鮑作人)가 따고 잠녀(潛女)들은 주로 해안가 얕은 곳에서 미역을 땄었다.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1633~1704)가 쓴 ‘지영록(智瀛錄)’에 보면 “모슬진 군제의 조정, 방호소의 군기확립, 선격(船格)과 포작(鮑作)의 이중 고역을 감했고, 뱃사람들에게 지웠던 관가의 사용 물품을 혁파했다. 또 잠녀들의 고충을 덜어 주었다”라고 기록했다. 여기에서 보면 포작이가 전복도 잡으면서 사공, 격군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고 잠녀가 포작인과 같이 전복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은 “섬 안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으므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고 했다.

남자(어부)들이 바다에 나가 죽거나 바다일이 고(苦)돼 육지로 나가는 남자들이 귀하게 되자 해녀(海女) 즉 좀수(潛嫂) 좀네(潛女)도 전복 따는 일에 동참하게 되고, 남자의 수가 계속 줄어드니 포작인(鮑作人) 노릇도 결국 여자들만 하게 됐다.

10년 전 음식기행을 하면서 남해 군청에 들른 적이 있다. 이때 남해군 문화관광과에서 조선 영조 때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다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후송 유의양(1717~1788)이 1771년에 기행문체로 쓴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이 기행문에는 후송 유의양이 장날에 시장에서 시장 구경을 하는 내용이 아주 재미있게 적혀 있었다.

기행문은 “장날에 시장에 가보니 물산은 전복, 홍합, 미역 따위 등 생선지속이라 했고 후송이 묻기를 어디에서 살며 생복을 어느 곳에서 잡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중략)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길 ‘생복 따는 거동을 본 즉 포작이들이 겨울에도 옷을 벗고 물속에 개구리처럼 뛰어 들어가 물속에 거처 없이 빠져 있다가 수식경이 지난 후에 도로 나와 바닷물 위에 뒤웅박을 대고 엎드려 숨이 복받쳐 숨을 두르지를 못하고 겨우 쉬어 즉시 또 들어가 캐내어 오니 포작의 거동이 극히 불쌍하고 생복하나의 값이 여러 냥(兩) 싸다’라 했다”는 내용이다. 즉 해녀들이 깊은 물속에서 잡아 올린 전복에 비하면 값이 너무나 적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청정 해역인 맑고 푸른 미조 앞바다와 상주에서 세존도까지 생복을 캤다고 한다.

특히 남해 앵강만(홍현리 앞바다)은 현재까지 생복의 산지(産地)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은 전복 이외에도 소라, 해삼 등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 포작이 전복죽
이곳 청정해역에 자라는 다시마나 미역 등 해초류를 먹고 자라는 전복은 윤기(潤氣)가 흐르고 맛이 뛰어나다.

전복은 다시마, 미역 등 해초류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죽을 쑬 때 내장을 넣고 끓이면 해초류의 색깔처럼 죽에 푸른빛이 돈다. 전복죽은 전복 내장에서 배여 나온 푸른빛과 전복을 볶을 때 넣는 참기름의 은은한 향, 싱싱한 전복살의 부드럽고 쫀득한 식감(食感) 즉 색(色), 향(香) 미(味)가 어우러져야 감칠맛이 난다.

궁중에 진상하기 위해 포작(鮑作)이가 잡은 생복(生鰒)으로 끓인 왕의 초조반(初早飯)으로 올린 전복죽, 그 맛이 바로 이 맛일 것이다.

남해 앵강만에서 잡은 생복으로 끓인 전복죽을 필자는 거듭 ‘포작이 전복죽’ 이라고 명명(名命)한다.

<김영복 소개>
식생활문화연구가, 시인, 칼럼니스트, (전)미국체육대학교 경영부총장, (전)전국직업전문학교협회 회장, (전)서진의료재단 이사장, (현)세계활무도연맹 총재, (현)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현)주식회사 퍼스날가드서비스 회장, (현)라미드호텔전문학교 이사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별미 산책(팔복원), 한국음식의 뿌리를 찾아서(백산출판사), 시집 無心茶(백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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