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아닌 대진이라고?

 
우리는 고구려 후예였던 대조영이 고구려의 맥을 이어 발해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발해라는 국호는 당에서 내린 칭호요, 대조영은 이 칭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사실 대진의 역사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국호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이유는 대진이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 일본이 각각 자국을 중심으로 정리한 대진사가 우리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발해’라는 국호를 당으로부터 받았고 이뿐만이 아니라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당서>에 발해와 관련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해 (당나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이라고 했다. …(중략)… 예종 선천 때에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에 책봉하자 이때부터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환단고기를 쉽게 풀어쓴 안경전 씨는 “당시 역사적 정황을 보면 당나라가 발해군왕 책봉을 보냈을지라도 대조영은 그 책봉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군사적으로도 우세한 입장에서 당나라를 위협하며 자체 연호를 쓰던 대제국의 황제 대조영이 당나라에 복속을 뜻하는 발해 군왕 책봉을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현재 당나라의 기록만 있고 대진의 기록이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말갈이라고 부르다가 발해라고 고쳐 부른 것은 대진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가 외교 정책상 일방적으로 부른 호칭”이라며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대무예는 무황제라고 칭하고 활발하게 주변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는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저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와 함께한 발해로 기억할 것이 아니라 사료 연구를 통해 정확한 대진사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필요한 부분이 어찌 ‘대진사’뿐이겠는가?

‘내용이 허무맹랑하다’하여 위서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낮춰보는 것이다. 이 역시 식민사관에 젖어든 탓이다. 지금까지 총 5회에 걸쳐 환단고기를 조금이나마 소개한 그 바탕에는 아직도 우리나라 사서보다 중국 사서에 의존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이다.

환단고기의 내용대로라면 우리 역사는 반만년보다 훨씬 오래된 8000~1만여 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일까.

혹자는 연구한 결과 환단고기에 대해 민족의 자부심과 자 긍심을 갖게하는 데 의의를 둘 뿐 그 사실은 믿지 않는다고 한다. 글쎄, 논란으로 얼룩진 고기(古記)를 단순히 자위하는 용도로만 봐야 할 것일까. 고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사실(史實)과 진실을 그저 외면해야 하는 것일까.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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