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 이은정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1811년 교인들은 다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일은 20년이 지난 1831년에야 교황청이 직접 나서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를 임명하였다.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지만, 조선국경까지 오는 데 3년이란 세월이 걸렸고,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였다. 여기에는 그들 소관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은 북경교구 선교사들의 방해가 있었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L.M.J.) 주교가 입국하여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1839년(헌종 5)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다툼으로 인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3인의 선교사가 모두 순교하였고, 유진길(劉進吉)·정하상(丁夏祥)·조신철(趙信喆) 등 교회의 중요 인물이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 정하상은 재상에게 올리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통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는 신부 김대건(金大建)의 체포가 발단이 되어 김대건과 남녀 교우 9인이 순교하였다.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 때 일어난 것으로 과거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광범하고 혹독한 것이었다. 그는 초기에 천주교를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남침야욕을 막기 위해 주교 베르뇌(Berneux,S.F.)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병인년 초에 주교 베르뇌의 체포로 시작되어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전교 중이던 선교사 12명 중 9명과 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정의배(丁義培)·최형(崔炯) 등 교회의 지도층 평신도들을 거의 모두 처형하였다.
 

▲ 로즈 제독(중앙)과 기함 La Guemiere 수병들(1865)


살아남은 3인의 선교사 중 신부 리델(Ridel,F.C.)은 중국으로 탈출하여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로즈는 군함을 이끌고 한강과 강화도에 나타나 선교사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이로 인해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프랑스함대가 서강(西江)까지 침입하였다고 해서 천주교인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인근 양화진(楊花津, 일명 切頭山)을 새 형장(刑場)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천주교인을 무수히 학살하였다.

1868년 오페르트(Oppert,E.J.)가 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신부 페롱(Feron,S.)과 일부 천주교인이 이 일과 관련되었다고 해서, 해미지방(海美地方)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박해가 일어났다. 병인박해 때 희생된 천주교인은 약 1만 명을 헤아린다.

이렇게 거듭 박해를 받음으로 해서 처음 양반계급과 지식층의 교회에서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의 교회가 되어갔고, 도시에 집중되었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하여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에 조선정부가 미국을 비롯한 구미(歐美) 여러나라들과의 조약을 맺고, 특히 1886년의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프랑스 선교사들은 개항지에 토지를 구입하고 건축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증명서였던 호조(護照)만 지니면 국내 어디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천주교인이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1899년 조선교구장인 주교 뮈텔(Mutel,G.)과 내부 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교민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5년 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들이 지방 본당에 합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천주교는 임진왜란으로 이미 그 체제의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더욱 꽁꽁 묶어서 양반 중심의 체제를 유지를 하고자 했던 조선에 굴러 내린 돌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깨지지 않았고, 천주교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렸다.

어쩌면 그때 천주교를 용인하고 변화해야 할 때였는지 모른다. 그랬다면 유교의 굴레를 용감하게 벗어던졌던 사람들이 조선을 더 일찍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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