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최재형의 삶 (上)
[칼럼]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최재형의 삶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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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정은 원장
▲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정은 원장

약 150년 전 민족의 이산 즉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에다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살길을 잃은 주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것이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주로 이스라엘 민족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나, 한민족에게도 약 150년 전 민족의 이산 즉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에다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살길을 잃은 주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것이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그중에 1860년 러시아령이 된 연해주는 인구가 희소하여 함경도 등 국경지방 주민들에게 신천지였다.

1863년 북한 지방에 가뭄이 휩쓸자 함경도 평안도 지방민들이 집단적으로 연해주로 이주했다.

1867~1869년 사이에 1800명이 이주하여 티진해, 안치혜, 시디미의 3개 마을이 형성되었다. 1869년 대기근 때 11~12월 사이에 4500명이 넘어갔다. 1870년대에도 한인들의 이주는 계속 이어져 남부 연해주에 시닐리코프, 코르사코프, 푸틸로프카, 크로우노프카 등의 촌락들이 계속 생겨났다.

러시아 당국은 대체로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되던 1900년까지는 연해주 개척에 한인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인들의 월경이주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 최재형 가족사진(그의 형 알렉세이 세미노비치(왼쪽), 조카 레프 뻬뜨로비치(가운데), 1915년)

9살의 최재형이 아버지 최형백 손에 이끌려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1869년이었다. 1995년 필자가 모스크바에서 만난 그분의 따님 최 올가 뻬뜨로브나(당시 90세)는 회상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조부는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러시아에 오셨다.” 아버지 최형백은 노비였고 어머니는 관청의 기생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그해 기근이 들자 노비들을 이끌고 관청의 곡식창고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까닭에 쫓기는 몸이었다.

개척지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아버지와 형은 일에 바빠 어린 최재형은 형수 손에 맡겨졌다. 형수는 어린 최재형을 양식만 축내는 존재로 여겨 밥도 잘 주지 않고 구박했다. 1871년 어느 날은 형수가 밥으로 멀건 누룽지죽을 주었다. 최재형은 죽그릇을 형수에게 던져버리고 집을 뛰쳐나왔다. 걸어서 포시에트 항구에 도착하여 지쳐 잠이 든 그를 선원들이 선장 부부에게 데려갔다.

그는 견습선원이 되었다. 배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와 인도양, 수에즈 운하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왕래하는 상선이었다.

▲ 블라디보스톡의 고려인 거리. 한인밀집지역으로 공식거리 이름이 카레이스카야 즉 고려인 거리다.

자식이 없었던 선장 부인은 그에게 러시아어와 과학, 그 밖에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으며, 많은 독서를 했고, 배가 여러 나라 항구를 거치는 동안 견문을 넓혔다.

배가 낡아 폐선하게 되자 1878년 선장 부부는 최재형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뽀뜨르라는 이름과 세메노비치라는 부칭(父稱,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러시아의 중간 이름)을 주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의 사업가인 친구에게 추천하였다.


그해부터 1881년까지 3년 동안 최재형은 선장 친구회사의 중 요한 종업원으로 존경을 받았다. 적지 않은 재산도 모은 최재형은 1881년 아버지와 형을 찾아 포시에트 지역으로 돌아왔다.

안치혜 마을의 집에는 형 최 알렉세이가 농사일에 관심이 없어 아버지 최형백만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집안은 어렵지 않았으나 농사용 가축이나 농업 용구도 없었다.

최재형은 사역용 말과 착유용 암소, 작은 가금(家禽) 등을 사고, 새로 집을 지었다. 형의 아들인 조카를 양자로 삼아 자신의 아들과 함께 교육시켰다.

1882년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만강의 한국 접경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도로를 개설하는 건설국에 통역으로 취업했다.

한인들은 도로공사 인부로 일하였는데, 대부분 문맹이며 러시아어를 몰랐다. 이 점을 악용하여 청부인들은 셈을 속여 잦은 분쟁이 일어났다. 최재형은 통역자라서 그럴 권리가 없었지만 한인 노동자들을 변호했다. 한인 노동자들은 이 통역자를 좋아하며 따랐다. 1888년 도로건설의 공로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1893년 한인들의 수효가 점점 증가하고 한인 마을들이 계속 생겨나자 러시아 정부는 안치혜읍을 만들고 최재형을 읍장(도헌-都憲)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마을 공동자금으로 번식력이 높은 종우, 모터가 부착된 탈곡기, 슬라뱐까 같은 바닷가 마을을 위해서는 공용 어망과 어선을 구입하였다.

마을은 10~15채의 농가로 된 농장으로 나누어 어기(漁期)가 도래하면 농장들이 차례로 어망을 이용하였고, 잡은 고기는 참가한 사람들 간에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탈곡기는 한 마을에서 3~5일 동안 사용한 후 그 다음 이웃의 탈곡장으로 가져다주었다.

▲ 4월참변 당시 블라디보스톡 한인 학살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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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훈 2013-05-14 17:46:55
마지막 사진을 보니 일본놈들 다시 미워지네 일본은 과거사를 100% 완벽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