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쌍사자석등을 지금까지 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가회면 주민들 덕이다. 1933년 주민들은 석등을 면사무소에 숨겼다.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시절 곳곳에 있는 우리 유산을 가져가던 일본인들이 이 석등 역시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주민들은 먼저 석등을 숨겨놓고 195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사자 두 마리가 서 있는 곳은 참 특이하다. 영암사지에서도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인데 무지개계단(虹霓段)을 조심스레 올라야 석탑을 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발딛는 계단의 너비를 보니 크기를 보나 양옆 무지개계단은 장식용인 듯하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불멸을 상징하는 무지개를 건너 극락에 다다르기를 소망했던 당시 신라인들의 염원을 담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오르고자 했던 다짐을 느낄 수 있다.
홍예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게 쌍사자다. 그 터는 ‘凸(볼록할 철)’을 닮았다. 볼록한 부분에 바로 쌍사자석등이 있다. 공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당시 사람들의 지혜에 또 감복한다.
석등을 뒤로 하고 불상을 모셨던 가람답게 터에 남아있는 조각의 흔적은 화려하다. 특히 석등 왼편으로 나있는 기단을 따라가면 그 중앙에 계단이 있는데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새의 형상으로 얼굴은 사람이다.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천상의 소리라고 하여 묘음조(妙音鳥), 호음조(好音鳥), 미음조(美音鳥)라고도 하며, 극락에 깃들어 사는 새라 하여 극락조(極樂鳥)로도 부른다. 얼마나 듣기 좋기에 수려한 수식어를 한몸에 받았을까. 상상의 소리를 마음으로 들어본다.
재미있는 설(說)은 ‘쌍사자석등이 서 있는 곳 일직선상에 제일의 명당 무지개터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가모산재 뒤로 뉘엿뉘엿 질 무렵 무지개터엔 석양이, 쌍사자석등엔 불빛이 비치니 이 광경을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또한 명당의 기운을 받은 영암사지이니 영험한 사찰이라고 이름난 것 역시 마땅하다고 본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영암사지다.
대웅전 격인 영암사지 금당터엔 비석을 받치는 거북이가 위엄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사실 몸만 거북일 뿐 얼굴은 용이라고. 비석 받침을 귀부(龜趺)라고 하는데, 있어야 할 비석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비석 위에 올려 있던 머릿돌도 없다. 양옆으로 연대가 다른 귀부만이 금당의 호위장군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자 두 마리와 달리 이 둘에겐 카리스마가 넘친다.
금당터는 영암사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가려져 쉽게 찾을 수 없다. 완연한 봄이 오면 비원(秘苑)의 느낌이 물씬 날 것 같아 초봄에 들른 게 아쉽기만 하다.
한 바퀴만 돌아도 영암사는 수려한 절간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통일신라시대를 지나 불법이 성행했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다움의 극치였을 터.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새로운 부활을 꿈꾸고 있다. 1984년부터 꾸준히 동아대의 조사 및 발굴을 기반으로 복원사업에 들어가고 있다. 모산재를 배경으로 화려했던 영암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날을 꿈꿔본다.
[김지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