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1절 기념 행사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기고] 3·1절 기념 행사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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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정신구국운동범국민연합 김동환 상임총재
천도교 전 교령

 
삼일절은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던 날을 기리는 정부의 4대 국경일 중 하나이다.

만세를 부르다가 수많은 인명을 빼앗겼던 이 날은 역사적으로 오직 한번 있었던 중대한 날로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용감한 한민족의 행동을 통하여 일본 외교의 허위성이 드러났고 한민족은 생명을 받쳐가며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참전국들이 가진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선언’에서 종전 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확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3·1운동은 당시 의암 손병희 선생을 주축으로 10년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운동이다. 특히 천도교를 중심으로 일본 헌병의 날카로운 감시를 피해가며 막대한 자금을 모았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사전 배포하였다.

또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 각처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비밀 연락을 취하였다.

당초 탑골(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했으나 거사 당일 민중과 학생들의 우발적 선동으로 희생이 커질 것을 염려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 대표가 낭독했다.

화산이 폭발하는 듯 울려퍼진 ‘독립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태극기의 물결은 온 천지를 누볐다. 왜경이 휘두르는 장검과 쏘아대는 총탄에 무참히 쓰러지는 동포들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겁내지 않고 만세를 외쳤던 엄청스러운이 역사는 세계 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우리 민족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끝없이 펼쳐져 산간벽촌까지 번져 갔다. 한 달 뒤인 4월 1일에는 16세의 어린 소녀의 몸으로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용감하게 민중을 선도하며 만세를 부르다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유관순 열사와 같은 인물도 나타났다. 그의 업적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들과 이를 취재하는 보도진들에게 특별히 묻고 싶은 말이 있다. 3·1절 행사와 관련한 취재와 특집 방송 및 언론 기사가 대부분 유관순 열사에만 치중되어 있으며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거사 준비, 희생, 이후의 독립운동 등에 대해선 아주 잠깐 다루거나 아예 다루지 않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이에 뭔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유관순 열사의 만세 시위와 희생은 3·1운동사에서 한 송이 ‘꽃’과 같다면, 손병희 선생과 민족대표들은 ‘씨’에 해당한다. 그런데 씨 없이 꽃이 필 수 있겠는가. 꽃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먼저 뿌려진 씨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씨가 뿌려졌기 때문에 수천 송이의 꽃떨기가 이루어져 거족적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인데, 왜 유관순 열사만 3·1독립운동의 영웅처럼 다루고 있는 것인가.

▲ 3·1운동이 주로 일어난 지역을 표시한 일제 측의 지도로, 3.1운동이 일어난 장소를 점으로 찍어 표시하였다. (사진 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온 겨레가 한 마음으로 뭉쳤을 때가 언제 있었으며, 그 때만큼 용기 있는 민족이었을 때가 언제 있었으며, 이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추진해 왔던 의암 손병희 선생 같은 분과,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기로 작정하고 <선언문>에 용감하게 서명하신 애국선열들이 언제 또 있었던가.

유관순 열사의 고향 아우내를 찾기 전에, 3·1독립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모의하고, 목숨 건 만세 선창자를 길러낸 <봉황각>을 먼저 찾아보고, 그 곁에 있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와, 거국적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금의 진원지인 <천도교중앙대교당>과 파고다 공원의 동상들도 살피면서 유관순 열사를 극찬함이 옳지 않은가.

그리고 훌륭하신 사학자님들에게도 당부 드린다. 3.1운동의 실체를 왜곡하면서까지 자기네 종파와 자기고향의 특정 인물만을 부각시키는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지 말고 학문적 양심으로 정확한 사실을 밝혀주기를 주문한다.

불과 90년밖에 되지 않은 민족적 거사 3.1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해방 후 미군정은 민족적 행사와 민족종단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거나 누락시켰으며, 그 미군정의 힘을 등에 입은 정권과 그 종교 조직들이 집권하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금도 그런 류의 학파나 종파에서는 ‘비오는 날 장독 뚜껑 덮은 공’을 내세우며 그것을 부각시키려 할 뿐 장을 만들어 모두가 먹을 수 있게 한 주인공의 역사적 사실은 왜곡하고 있으니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5년에는 삼일절에 정부기념 행사를 유관순 기념관에서 한 적이 있어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3대 종단 대표들이 ‘역사왜곡’이라고 강력히 항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10년 제91주년 기념식을 또다시 유관순기념관에서 하기로 결정했다가 3.1절을 불과 이틀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하기로 전격 변경한 일이 있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다시 한번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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