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중구 동산동 대구 제일교회 주변에 목련이 펴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공부보다 독립이 급선무’
학생들 경찰 피해 다닌 오솔길
숲은 사라졌어도 애국혼 남아

‘너희 나라를 구하라’
교회 중심으로 만세운동 진행
운동 후 대구 기독교계 급성장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대구는 경북 지역 중 가장 먼저 개신교 교회가 생긴 지역이다. 이 지역의 기독교 역사는 3.1운동을 빼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 목련이 피기 시작한 3월 우리 민족의 암흑기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온 대구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제일교회로 가는‘3.1운동길’… 애국심 느껴져
대구 중구 동산동 서문시장역 5번 출구로 나와 300m쯤 가다 보면 엘디스리젠트호텔이 나온다. 그 골목으로 들어가 3분 정도 걷다 보면 조금 긴 계단이 나오는데 바로 ‘3.1운동길’이다. ‘90계단길’이라고도 불리는 이 계단은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하려고 지나다니던 애국의 혼이 서린 오솔길이다.

현재는 당시의 우거진 소나무 숲도, 오솔길도 찾을 수 없지만 당시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니던 애국학생들의 발자취가 땅밑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하다. 대구시는 3.1운동 84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길을 ‘3.1운동길’이라 이름 지었다.

“하루는 상급생 언니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공부하는 거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우리도 이 운동에 나가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성이 불 붓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기숙사 이 방, 저 방에 쫓아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기와 그날에 입고 나갈 의복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 글은 3.1운동 당시 신명여중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학진 할머니의 친필회고록에서 발췌한 글이다. ‘3.1운동길’ 양쪽 벽에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설명들과 관련 사진, 사례 등이 전시돼 있어 이 길을 걷고 있으면 그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 ‘3.1운동길’이라고도 불리는 이 계단은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지나다니던 오솔길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구 3.1운동 기독교계에서 시작되다
“대한 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열사들은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서명했고 이는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서울에서 시작된 수많은 군중의 흥분된 만세 소리는 전국 각지로 퍼져 3월 8일 대구에 이르렀다. 개신교계에 따르면 대구의 독립운동은 기독역사가 이재원 씨로부터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대구의 3개 교회(현 제일‧남산‧서문교회) 중심의 만세운동을 소개했다. 대구지방 3.1운동은 제일‧남산‧서문교회 목회자들과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대구성경학원의 교사 및 학생들 주축으로 진행됐다.

‘너희 나라를 구하라’고 명령하신다고 믿는 신앙심이 이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3.1운동은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 일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변화돼 대구 기독교계는 급성장했다.

◆신축한 제일교회 성이 연상돼
‘3.1운동길’을 오르면 오른쪽에 대구 제일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두 개의 첨탑이 눈길을 끈다. 이어 창문과 문 등 견고하게 지어진 외관은 성을 연상하게 한다. 밝은 회색으로 된 벽에 빛이 반사돼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엄청난 규모로 웅장함이 느껴지는 이 교회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5층으로 구성된 제일교회 본당이다. 건물 안은 많은 방문객 때문인지 개방돼 있지 않았다. 선교 100주년을 맞은 제일교회는 1만 2029㎡ 대지를 사들여 신축했다. 제일교회는 본당과 100주년 기념관, 남성로 선교관 총 세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 중 남성로 선교관(구 제일교회)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본래 계산성당 뒤 약령시장 부근에 있는 이 선교관이 본당이었기 때문이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0호인 이 선교관은 경북지방 처음 생긴 개신교 교회다.

▲ 구 대구 제일교회의 외관(왼쪽, 사진출처: 문화재청). 신축된 대구 제일교회 외관(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구 제일교회
선교사들은 이 지역을 개화시키기 위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다. 고종 32년(1985) 부산에 있던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대구로 옮겨지면서 개신교 신도가 늘기 시작했다. 1908년 재래양식과 서구 건축양식을 합작시켜 신도들의 헌금으로 현재 대구시 중구 남성로에 구 제일교회(현 남성로 선교관)를 지었다. 이후 1937년에 벽돌로 높이 33m, 13평 넓이의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이 됐다.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의 건물은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 종탑을 세운 간결한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13~15세기 유럽에서 널리 유행한 고딕건축양식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어 대구 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또 많은 교회 중 가장 오래됐으며 선교사들이 의료‧교육을 전개했던 거점으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붉은 벽돌로 된 건물 외관은 담쟁이넝쿨로 둘러 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입구에서 보면 왼쪽으로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 기념비가 보인다. 대구 경북 지역의 사월교회 등 수십 개의 교회와 계성학교를 건립한 아담스 목사를 기리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1923년 대구를 떠난 아담스 목사를 위해 1935년 조선 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에서 세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계단이 보인다. 계단 위 고딕양식으로 만들어진 창문으로 들여오는 빛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1층은 사무실·유치원·청소년 예배실로 2층은 대예배실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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