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본문에서 관심이 가는 것은 ‘또 다른 보혜사’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누가 봐도 기존의 보혜사가 있기에 그가 아닌 다른 보혜사란 의미로 해석되며, 이 또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의 부탁에 의해 하나님이 보내는 보혜사로 정리가 된다.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는 말씀에서, 난하주에 ‘대언자를 혹 보혜사’라 했으니, 기존의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천 년 전 바로 이 보혜사인 예수께서 자기가 아닌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 또 다른 보혜사는 진리를 가지고 오는 진리의 영으로 영(靈)은 사람 안에서 사람과 함께 역사함을 알리고 있다(요 14:17). 그러므로 진리의 영 즉, 진리의 성령 보혜사가 함께하는 사람 역시 보혜사가 된다.

보혜사(保惠師)라 함은 ‘은혜로 보호하고 가르치는 스승’이란 뜻을 가지고 있듯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증거하고 있다.

또 2천 년 전,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으로 왔으며(눅 1:17),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듯이(요 5:43), 오늘날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다(요 14:26)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얼마만큼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해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누차에 걸쳐 언급했듯이 신앙은 맹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적은 영생(永生)이며,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고 하고 있다.

그런데 2천 년 전 예수께선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하시며, 할 말을 다하지 않고 가셨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함은 당연지사다. 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라고 기록된 말씀을 보아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음도 어쩌면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한다고는 했지만, 신앙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음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님을 기록된 말씀들이 정확히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아 신앙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는 보혜사가 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처럼 오늘날 진리의 성령 보혜사가 옴으로 있게 될 일에 대해 2천 년 전 예수께선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25)”고 미리 잘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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