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19~20)”

말씀을 왜 길 도(道)라 하는가. 신앙의 목적지인 천국 즉,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가기 위해선 이 말씀을 길로 삼아 가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도라 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본문에서는 신앙인들을 향해 생명과 복이냐 사망과 저주냐, 이 둘 중에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하시면서 ‘신앙의 목적이 영생’이라면, 살기 위해선 생명을 택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느 길이 사망의 길이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도(道) 즉, 말씀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 도다(호 4:6)”라고 했을까. 알아야 할 지식은 바로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BC 1600년경 중국 고대 왕조인 은(殷)나라 마지막 임금이 달기라는 간신배의 말만 듣고 폭정을 일삼던 때였다. 강태공(본명: 姜尙)은 책만 읽고 낚시로 소일거리 삼던 시절, 어느 날 마씨 부인이 품팔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멍석에 널어놓은 곡식이 비에 다 쓸려가 버리고 말았는데도 남편 강태공이 독서에만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면서 퍼붓고,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태공은 또 낚싯대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리니 마씨 부인도 더는 못 참겠다며 집을 나가 버렸다.

그 후 주(周)나라 문왕과 무왕을 도와 부패하고 타락한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일등 공신이 되고, 훗날 제(齊)나라의 시조가 된 후 황금마차를 타고 마씨 부인이 사는 마을을 지날 때, 이 소식을 듣고 나온 마씨 부인이 “여보 날 좀 봐 주시오” 하고 애원했으나, 강태공은 부인에게 물을 한 바가지 가져 오게 하고, 물을 떠오자, 물을 바닥에 버리고는 부인에게 다시 주워 담아 보라고 하였고, 강태공은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즉,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유명한 고담(古談)을 탄생시킨 중국고전으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내가 남편을 잘 골랐건만 복을 내 스스로 차 버렸으니 이렇게 박복한 팔자가 또 어디 있을까” 하며 한탄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전설과 같은 사연이다.

이 고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뭘까. 먼저는 선택의 문제며, 다음으론 선택했다면 인내해야 한다는 교훈을 던지고 있다.

“내가 남편을 잘 골랐건만…”이라는 마씨 부인의 고백과 같이, 잘 선택했다. 하지만 고난과 고통을 참아내지 못함으로 그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결과로 끝을 맺고 말았다.

강태공은 13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기까지 회수강에서 낚시하며 때를 기다리는 60년의 삶을 전반기로 보내며 후반기 60년의 삶 즉, 후일을 도모해 왔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훗날 유교의 경전이라 칭하는 주역(周易)의 확립자가 됐으며, 손목의 손자병법의 뿌리가 되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병법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32대에 800년을 이어가는 전국칠웅인 제나라의 시조가 된다.

본문과 같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앞에도 복과 사망이라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으며, 선택도 자유다. 그러나 한번 선택한 길은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무서운 교훈을 고담은 우리에게 주고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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