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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다. 이제 우리는 문학인 고산 윤선도가 아닌 정치가이자 혁신가인 고산 윤선도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보자.

고산의 역량이 담긴 세연정

 

▲ 고산의 역량이 담긴 세연정  ⓒ글마루

‘어부사시사’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 세연지(洗然池)다. 옥소대에서 바라보면 바다와 세연지-지금은 나무가 자라 세연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가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병자호란(1636~1637)에 ‘뭍이 아닌 섬에서 살겠노라’라고 다짐한 고산이 잠시 보길도에 들러선 그 자연에 반해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연과 어울려 자신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데 그중 야심찬 작품이 세연지와 세연정이다. 포구가 보이는 자리에 속세의 티끌을 씻어내고자 한 고산은 ‘心’의 형태로 못을 만들었다. 세연정을 방문하면 옥소대에 올라가 고산의 마음을 한번쯤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선비가 과학까지 섭렵했으니 돌다리이자 낙차를 이용한 인공폭포인 판석보가 그 결정체다. 비가 오지 않을 땐 돌다리로, 비가 내릴 땐 폭포가 된다고 하니 고산의 눈썰미와 심미안이 기막힐 따름이다.

고산은 남자 어린이들에게 채색 옷을 입혀 어부사시아에 맞춰 춤을 추게 하곤 세연정이나 옥소대에 올라 연못에 비친 춤사위를 즐겼다.

글과 하나되는 즐거움을 느끼다

 

▲  글과 하나되는 즐거움 ‘낙서재(樂書齋)’ ⓒ글마루

글을 자유자재로 즐길 줄 알았던 고산 윤선도는 보길도에 터를 잡으면서 거처를 ‘낙서재(樂書齋)’라 지었다. 그는 풍류가로서 그 면모를 거처에도 살짝 심어놨는데 바로 낙서재가 있는 마을이 부용(芙蓉)이다. 진흙탕 속에서도 고고하게 핀 연꽃에서 글을 즐기니, 참으로 멋진 고산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그가 글을 즐긴 곳은 낙서재와 마주보고 있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이다. 홀로 올라가 그곳에서 부용동을 내려다보며 학문의 즐거움을 느끼니 그야말로 정치적 실연을 승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동천’은 ‘하늘과 통한다’라는 뜻이요, 학문은 결국 태평성대를 위한 수단이니 결국 하늘의 이치와 통하여 요순시대와 같이 태평성대를 이루고 싶은 고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에서 바라본 바다

 

▲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에서 바라본 바다 ⓒ글마루

보길도엔 세연정, 세연지, 낙서재 등 고산 윤선도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았다. 그런데 고산과 숙명적으로 대립관계였던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손길이 남아있어 방문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알고 보았더니 1689년 여든을 넘긴 우암은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머물렀단다. 이곳에 머물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늙은이의 처지를 한탄하는 마음을 시로 바위에 새겨놓았단다. 지금은 그 글씨들이 점점 세월에 묻혀 눈에 잘 띄진 않지만, 탁본의 흔적으로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꼭 우암의 마음을 대변하듯, 바닷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그래도 편편한 바위에 올라선 노구는 한편으론 든든하지 않았을까 한다. 비록 보길도가 영원한 라이벌 고산의 영역이지만, 대가는 대가를 알아보듯 우암은 고산을, 고산은 우암을 서로 신뢰했다. 내로라하는 의원들도 우암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 때 고산의 약을 먹고 나았던 우암. 그래서인지 글씐바위엔 고산을 뜻하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인데
대궐에 계신 님을 부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훈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잊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백성을 위한 마음 간척사업에 담다

 

▲  백성을 위한 마음 간척사업에 담다 '진도 굴포리 간척지' ⓒ천지일보(뉴스천지)

전남 진도 굴포마을에도 고산의 흔적이 있다. 조선 건국 이래로 최초의 민간 간척사업을 일궈낸 덕에 이 마을 주민들은 대대손손 터를 잡고 밭을 일구고 있다. 그리하여 매년 정월대보름엔 마을 주민들이 사당에 모여 고산에 감사의 제를 올린다.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 획기적인 일이었다. 병자호란으로 백성의 삶은 고단했는데 이 간척지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간척지의 규모는 현재 굴포리 신동마을부터 연동마을까지 약 60만 제곱미터, 축구장 크기의 300배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현재 고산을 모신 사당은 고려시대 배중손(?~1271) 장군의 사당에 세를 든 모양새다. 겸해서 사당을 쓰는 것이 아쉬운 게 아니다. 관리가 소홀하여 사당 이곳저곳에 잡초가 무성할 뿐 아니라 훼손된 사당을 보노라니 그저 씁쓸한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해남 윤씨 제각을 찾다

 

▲  해남 윤씨 제각을 찾다(금쇄동 제각과 묘소) ⓒ글마루

매년 음력 10월 23일은 고산 윤선도 시제다. 2012년 12월 6일이 그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해남 윤씨 손(孫)들이 모여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기에 여념 없었다. 고산은 금쇄동에서 다섯 벗을 만났는데 바로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이다. 그래서인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제각과 무덤이 금쇄동에 있다-엔 눈 내리는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와 대나무, 졸졸 흐르는 시내, 바위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침인지라 어둠 내내 빛을 밝힌 달은 제 사명을 다하곤 잠시 쉬러 갔지만.

 

이날 고산은 손(孫)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흠향했을 터다. 그리곤 금쇄동 일대를 둘러보지 않았을까.

시제를 마친 후 해남 윤씨 종손 윤형식 옹은 “우리 전통문화를 담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전달하는 천지일보에서 고산 할아버지를 취재하러 왔다”며 반가이 맞이했다.

이날은 또한 고산의 국가 표준영정이 선보여지는 날이기도 했는데 시제를 끝낸 손(孫)들은 연동에 있는 고산윤선도기념관에서 영정 봉안식을 소박하게 치렀다. 국내 최고 화백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4년 만에 완성한 영정 속 고산과 인사드리러 온 후손의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

반질반질한 돌을 시샘하는 뾰족 산(보죽산)

 

▲  반질반질한 돌을 시샘하는 뾰족 산(보죽산) ⓒ글마루

보길도 망끝전망대를 지나면 공룡알 해변이 나온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젓갈 담는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지만 그 냄새도 잠시, 바다를 향해 얼굴을 든 돌들에 웃음이 나온다. 반들반들한 돌들이 서로 자신의 얼굴이 예쁘다고 뽐내며 바다 식구들에게 묻는 모습이니 어찌 웃음이 나지 않을까.

 

그 뒤로 보이는 뾰족한 산이 보인다. ‘뾰족산’ ‘뾰족산’으로 불리다 이를 한자로 적으니 보죽산이 되었단다. 돌들은 이리 둥근데 산은 뾰족하니. 아무래도 모나지 않은 돌들에 귀엽게 시샘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글: 김지윤 기자 / 사진촬영: 이승연 기자 / 슬라이드 편집: 손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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