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국 세계평화작가

▲ 한한국 세계평화작가(김포시 장기동)
나는 전남 화순군 청풍면 어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뱃속에 있었을 때 어머니는 나를 낙태하기 위해 양잿물까지 마셨다. 이유는 가난이 무서워서였다. 또한 아무리 60년대의 시골이라 해도 이런 자식 풍년은 흉이 잡힐 정도였다. “하이고, 광섭(큰형)이네는 자다가 이불만 들썩해도 애가 들어스나 비어잉!”

남 보기 부끄러웠던 어머니는 임신한 배를 쥐어뜯어 보기도 하고 별의별 짓을 다해보았으나 배는 계속 솟아오르기만 했다. 하다못해 어머니는 양잿물을 꺼내 한 사발이나 들이켰고, 결국 치료를 받았다.

이런 소동을 벌이고도 어머니는 나를 낳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있는 자식들만으로도 넘치는 데다 보릿고개도 지긋지긋했고, 주위 사람들도 그만 낳으라고 부추겼던 것. 이런 소동 속에 내가 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절대 낙태시키지 말라’는 태몽을 꾸신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나는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짓지 않아 호적에 올리지 않아 벌금을 물게 됐다. 호남의 유명한 고수(鼓手)였던 아버지는 풍수지리 성명학을 하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좋은 이름을 짓겠다고 말은 해놓고 나가시더니 몇 날이 지나도 들어오시지 않으셨다. 원래 아버지는 명창을 따라 집을 나가면 열흘도 상관없고 한 달도 좋은 양반이셨다. 그래서 면사무소에서 호적계를 보는 친척 아저씨가 찾아와서 재차 독촉을 하게 됐고, 어머니는 이 나라 이름인 ‘한국’이라 짓자고 했다.

“우리나라가 훌륭한 한국이면 우리 한국이도 나라 따라 훌륭해 질 것이고, 또 설사 우리나라가 없어진대도 우리 한국이는 남을 것.” 일제치하와 6.25 시대를 겪다보니 어머니는 자칫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 아들 이름을 한국으로 지어 우리나라를 지켜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머니에게 아들인 나 한한국은 우리나라의 한국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한국이란 이름이 호적에 오른 다음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불같이 화를 내면서 호통을 치셨다. 이미 작명가한테 부탁해서 지섭이란 이름을 지어왔다는 것. 그러나 어쩌겠나. 이미 올라간 호적을. 친척 아저씨도 아버지에게 우리나라 한국과 이름이 같으니 애국심이 절로 생기니 좋지 않겠느냐고 이름이 좋다고 하셨다. 아버지도 그제야 수긍을 하고 오히려 국수를 삶아 한한국의 이름 잔치를 했다고도 한다.

우리 어머니는 효부상을 받을 만큼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셨다. 호남의 유명한 고수(鼓手)였던 아버지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나라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고부관계’인데, 내겐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어머니와 내 아내 윤소천 시인이 평생을 두고 밀월관계를 유지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두 여자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해 오면서도 그 고마움을 몰랐다. 어느 날 복에 겨워 아내에게 이런 고마움을 내가 모르고 살고 있으니 나는 나쁜 놈이라고 팔자 좋은 투정을 하기도 했다.

내 아내는 어느 날 모처럼 아들 집에 놀러 오신 시어머니께 이젠 함께 살자고 간곡히 말했다. 어머니는 손자인 영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끔찍이 사랑하셨으면서도, 같이 사는 것 만큼은 끝까지 거절하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우리 부부에게 행복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우리 집에 살러 오셨다. 아니, 식물인간이 되어서야 몸을 의탁해 주신 것이다.

광주 남광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내려갔다. 내일이 고비라고 한 의사의 말과 달리 어머니의 상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았다. 서울 병원으로 모셔야겠단 생각에 파주 두산병원으로 옮겼다.

이틀을 못 넘긴다던 어머니가 조금씩 차도를 보이셨다. 무의식 같았지만 가끔씩 눈도 깜박거리시고 몸도 움쩍거리셨다.

“어머니, 제발 빨리 일어나세요. 그래야 어머니가 공부시켜 주신 제 글씨로 평화지도를 그려 보여드리죠.” 가슴이 미어지는 걸 참으며 간절하게 말씀드렸다. 아내도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며 간구했다. 그러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기약 없는 싸움이었다.

4개월가량 흐른 후에야 어머니는 우리 집으로 퇴원했다. 그로부터 어머니가 운명하실 때까지 나는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처음으로 소변 줄을 갈 때였다. 의식이 없었던 어머니가 부끄러운 듯 몸을 움찔했다.

“어머니, 제가 쓰러져 있었어도 간호해 주셨을 거잖아요. 저에게 이름을 지어주시고 아들이 크게 되라고 글씨도 배우게 해주셨죠. 그런 자식인 제가 뭘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편히 제 간호를 받으세요.” 내가 어머니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자 분명히 의식이 있으신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하루 빨리 한반도 평화지도 ‘통일’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작품에 몰두하면서도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리며 정성껏 간호를 했다. 또 다른 한반도 평화지도 ‘우리는 하나’를 작업하던 중에 어머니는 73세로 생애를 마감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장 심혈을 기울여 ‘나는 한국인이다’란 작품을 만들어서 용미리 납골당에 계신 어머니의 시신 위에 덮어 드렸다.

나는 당신이 지어주신 이름대로 한국, 한국인으로서 평화와 화합, 통일과 나눔이 온 세계에 꽃피울 수 있도록 ‘평화·화합지도’를 죽을 때까지 그리겠습니다. 그게 바로 당신께 내 할 수 있는 효를 다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