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의원 원장

 
중년의 멋진 부부가 진료실에 들어온다. 40대 초반의 남자는 얼른 보기에도 단정한 차림의 깔끔한 인상이다. 그러나 지친 표정의 부인은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이 무엇을 잘못했나보다 짐작하면서 찾아온 이유를 물어 보니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때문에 미치겠어요. 한번 욕실에 들어가면 두 시간 동안 나오지를 않습니다. 또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데 정말 질리도록 해요.” 그러자 남편은 쑥스러운 듯이 말한다. “나도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불안합니다.” 이 부부는 배우자의 부정이나 성격 차이 등의 흔한 이유가 아닌 남편의 ‘병’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결벽증’이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증상은 정신의학 용어로는 ‘강박장애’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2~3%에 해당되는 결코 드물지 않은 정신질환이다.

강박장애는 자신의 의지나 조절능력을 벗어나서 특정한 생각(강박사고)이나 행동(강박행동)을 반복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강박사고나 강박행동을 행하지 않으면 굉장한 불안이 느껴지므로 불합리한 줄 알면서도 반복하게 되는 것이 이 병의 특징이다. 정상인에게도 약간의 강박증세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정도가 심하여 심리적 고통이 생기고 일상생활이나 대인관계에 지장을 일으키면 병으로 진단된다. 만약 다른 사람이 환자의 강박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환자는 불안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된다.

강박장애의 증세는 매우 다양하다. 위의 사례와 같이 더럽다고 생각하여 반복적으로 씻거나 닦는 증상 외에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가스 밸브나 문손잡이의 잠김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증상, 책의 읽은 부분을 계속해서 다시 읽기, 물건을 반복적으로 정돈하기, 시험 답안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기, 좌우의 대칭상태를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정렬하기, 숫자를 세거나 셈하기를 계속하기 등의 증세들이 있다.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의 치료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두 가지는 치료약물을 복용하는 것(약물치료)과 스스로 불안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인지행동치료)이다.

약물치료의 경우 대개 항(抗)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병용 투여하면 복용 4~6주 만에 강박증세가 상당한 정도로 호전된다. 4~6주의 기간은 약물이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주로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교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인지행동치료란 환자가 가지고 있는 ‘더러움’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를 깨닫게 해 준 후에 순서를 정해서 강박행동을 한 가지씩 줄여 나가는 기법이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환자는 샤워를 하지 않는 날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매우 불안했지만 결국 그 불안이 없어진다는 것을 체험한 후에는 샤워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불안을 참지 못하면 머리를 감는 정도로 샤워를 대신했다.

환자는 자신의 강박행동 하나하나를 일지에 기록했고, 그때마다 겪는 불안의 정도를 수치(0~100점)로 표시했다. 이러한 불안 수치는 점차 감소하였고, 여기에는 부인과 아이들의 응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자신이 샤워할 때 나는 소리를 녹음한 후 자동차를 운전할 때나 쉬고 있을 때 지겹도록 틀어 놓았다.

자신이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씻는 소리를 녹음기를 통해서 실컷 들으니까 우습기도 했고 부끄럽게도 여겨졌다고 한다. 환자는 씻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씻고자 하는 마음이 갑자기 밀려들거나 ‘저 더러운 것들이 내 입으로 들어가서 병이 생기면 어떡하지?’ 등의 비합리적 생각들이 떠오를 때면 “그만” 하고 큰 소리를 내질렀다. ‘생각 멈추기(또는 ‘사고중단’)’라는 이 기법도 강박장애의 치료에 흔히 사용된다. 부부는 진료 시간에 일주일 동안 해 왔던 숙제 일지를 가지고 채점 받으려고 함께 온다.

부부는 언젠가는 100점을 받을 희망으로 열심히 다니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이혼 얘기도 아빠에 대한 비난도 없다. 한 가정의 갈등이 남편이자 아빠인 환자의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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