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12월 3일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를 마치고 경교장 입구 계단에 서서 찍은 기념사진으로, 한복을 입은 이시영 선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양복을 차려 입었다. 이시영 선생 옆이 김구 주석. (사진제공: 백범기념관)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껴안다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경교장은 우리나라 근현대 시기의 비극을 껴안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60여 년간 국민 10명 중 5명이 경교장이 어떠한 곳인지 몰랐다. ‘여관’ 또는 ‘정자’ 등의 이름으로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

경교장은 1938년 광산업을 하던 최창학이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죽첨장’이었으나 건물주인 최창학이 환국한 김구 선생에게 거처로 제공하면서 김구 선생이 옛 지명을 따라 지은 ‘경교장’으로 불렸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강점기 27년간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해방 후 환국해 마지막 임시정부(임정) 청사로 사용한 곳이다. 이곳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임정 국무회의가 진행됐으며,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남북 협상 준비가 이뤄졌다.

경교장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1946년 2월 13일까지 4개월간 임정 청사로 사용됐다. 당시 임정 요인으로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을 포함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15명이 경교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김구 선생은 환국 이후 경교장에서 3년 7개월간 기거했으며,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김구 선생 서거 후부터 삼성 측으로 소유권이 이전되기 전까지 경교장은 자유중국대사관, 6.25 전쟁 당시 미군의료부대 주둔지, 9.28 수복 후 미군특수부대 주둔지, 베트남 대사관저로 사용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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