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36계 가운데 첫째인 만천과해의 원문은 ‘비주즉의태(備周則意怠), 상견즉불의(常見則不疑). 음재양지내(陰在陽之內), 부재양지대(不在陽之對). 태양(太陽), 태음(太陰)’이다. ‘비(備)’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주(周)’는 일반적으로 두루, 전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주도면밀함을 가리킨다. ‘의(意)’는 의지 또는 생각, ‘태(怠)’는 해이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상황을 예상하여 주도면밀하게 대비하다가보면 지치기도 하지만, 자신이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오판하여 경계심이 풀린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의 부연 설명이다. 평소에 자주 보는 사물은 익숙해진다. 과거와 지금이 같다면 미래도 그럴 것이다.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면 누구나 의심하지 않는다. 누군가 일부러 동일한 현상을 반복한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둘째와 셋째 문장이다. 역(易)의 도는 순음(純陰)과 순양(純陽)을 모태로 변화한다. 현상계에는 순음과 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에는 반드시 얼마간의 음과 양이 혼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음은 비밀스러운 모략을 가리킨다. 양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공개적인 행동이다. 대(對)는 대립 또는 상반된 측면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대개 공개적인 측면만 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일부러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의 내부에는 음이 숨어 있다. 역으로 모략을 숨긴 사람은 겉으로 다른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대립하지 않는다고 적대감을 품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순진한 사람이다.

셋째 문장의 태(太)는 극단적, 특별함, 일상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공개적인 행동의 뒤에는 반드시 비밀스러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갑자기 필요 이상의 호의를 베푼다면 진의를 의심해야 한다. 반대로 누군가 극단적인 반감을 표시한다면 그의 내면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게는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크게는 국가 사이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노련한 음모꾼은 등 뒤에서 비밀스럽게 행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은밀해도 반드시 들통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음모꾼은 몰래 도둑질을 하거나 뒷골목에서 남을 해치는 짓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는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한다.

만천과해는 원래 황제를 속여 평온하고 안전하게 바다를 건넌다는 뜻으로 위장전술로 승리하거나 목표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명칭의 출전은 설인귀(薛仁貴)와 관련된다. 경기도 파주에는 설인귀가 적성면 주월리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임진강 가의 율포리에서 용마를 얻었으며, 백운리의 농민이 밭에서 갑옷, 투구, 칼이 들어 있는 궤짝을 캐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감악산 정상에는 마모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사람들은 이 비석을 빗돌대왕 또는 설인귀비석이라고 한다. 설마치 고개에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그가 놀던 공기돌이 있었다고 한다. AD 642년, 고구려를 침략한 당태종 이세민은 바다를 이용하여 요동으로 이동하기로 했지만 막상 바닷가에 이르자 겁이 났다. 전쟁을 만류했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회상하며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울지경덕(蔚遲敬德)이 장사귀(張士貴)를 추천했다. 장사귀는 설인귀를 불러서 대책을 물었다. 설인귀는 장사귀에게 귓속말로 안전하게 바다를 건널 방법을 제시했다.

어전에 나간 장사귀는 30만 명이 바다를 건너면서 먹을 양곡을 바치겠다는 부호를 만나보시라고 권했다.

황제가 해변에 이르자 1만호나 되는 집이 모두 한 가지 색으로 빛나는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노인이 뒷걸음을 치면서 황제를 방으로 모셨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백관들이 술을 올렸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우레처럼 들리며 술잔이 기우러지고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황제가 밖을 보니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장사귀가 일어나 사죄하며 ‘이것이 신의 과해지계입니다. 30만 대군이 이미 동쪽 해안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레이저와 같다는 대통령의 눈빛을 두려워하지 말고 설인귀처럼 과감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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