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떡명장 최대한 씨

▲ 최연소 떡명장 최대한 씨 ⓒ천지일보(뉴스천지)

빵 같은 질감 위해 연구… ‘호박소담떡’으로 명장돼
맛있는 떡 만들기 위해선 좋은 쌀과 좋은 재료 사용

[천지일보=김민지 기자] “제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도 떡을 만들게 하고 싶어요. 꼭 그렇게 해야죠.”

지난 2011년 대한민국 떡 명장 선발대회에서 최연소 떡 명장으로 뽑힌 최대한(27) 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경기떡집을 찾았다. 혈기왕성한 젊은 청년이지만 경력이 벌써 12년.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떡에 대한 열정과 포부가 느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떡 만들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춘기 시절엔 누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자랑이라도 하듯 ‘싸움’이라고 답하던 그였다. 이런 아들에게 부모님은 운영하고 있던 떡집에서 일하길 권했고, 이를 계기로 15살부터 떡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무작정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단지 ‘나도 할 줄 아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죠. 그렇게 일을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었어요. 제가 일을 그만두면 그 일은 고스란히 부모님에게 가중되니까요.”

어려서부터 일을 시작했기 때문일까. 시기적‧상황적으로 그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도 많았다. 힘든 시기에 그를 잡아준 것 역시 부모님이라고.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시기에도 저는 늘 떡집에서 일을 해야만 했으니 불만도 많았죠. 가장 힘들었을 때는 군 입대 전‧후였어요. 저도 여느 친구들처럼 놀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일 안한다고, 집 나간다고 했다가 아버지께 많이 맞았죠(웃음). 부모님이 절 잡아주셨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가.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낸 그는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했으니 성공도 남들보다 일찍 해야겠단 마음을 굳게 가졌다”면서 “그 후론 친구들과의 잦은 만남을 자제하기 위해 스스로 휴대폰을 정지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며 앞만 보고 달렸다”고 회상했다.

노력의 결실은 결과물로 나타났다. 지난 2011년 경기도와 경기농림진흥재단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떡 명장 선발대회에서 그는 당당히 대상을 수상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떡 명장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그가 직접 개발한 ‘호박소담떡’이다. 호박소담떡을 만들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그는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떡을 만들고 싶었다고 답했다.

“빵은 누구나 다 좋아하잖아요. 하지만 떡은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라지는 경우가 많고 세대에 따라서도 기호가 달라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떡을 빵처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다른 떡집에서 떡의 질감을 내는 법을 배워 와 저만의 방법으로 연구하고 응용해 탄생한 게 바로 ‘호박소담떡’이에요.”

▲ 최대한 씨가 직접 개발한 호박소담떡. ⓒ천지일보(뉴스천지)

그는 이제 집안의 자랑거리가 됐다. 아버지 최길선(61) 씨가 운영하는 ‘경기떡집’ 입구에는 ‘명장선발대회 대상’이라는 현수막과 수상 당시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명장이 된 후 입소문이 퍼져 이제는 강의 문의도 쇄도하고 있다. 이제는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강의하는 일이 기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가슴이 아파요. 한참 젊은 저도 떡집 업무가 힘든데, 강의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이에요. 바라는 게 있다면 저처럼 젊은 사람들이 배우러 와서 떡 업계를 이끌어 나갔으면 하는 점이에요.”

실제로 떡을 만드는 일은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보통 새벽 2~3시에 일어나 약 6시간 동안 그날 판매할 떡을 뽑는다. 추석, 설날 등 대목에는 2주 정도 잠을 포기해야 한다. 고작 30분 정도의 잠을 청할 수밖에 없지만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비록 몸은 힘들어도 열심히 사는 자신이 뿌듯하다며 미소 짓는 그였다.

최 씨에 따르면 맛있는 떡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좋은 쌀과 좋은 재료를 쓰는 것. 여기에 실력까지 뒷받침 된다면 좋은 재료의 맛을 100% 살릴 수 있기에 이 철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물가가 올라도 그는 재료를 아끼는 법이 없었다. 이렇다 보니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처음 떡을 만들 때는 재료를 듬뿍 넣는 게 무조건 좋다고 생각했어요. 가격은 안중에 없었죠. 어떻게든 손님들에게 맛있는 떡을 만들어 드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손님들이 재료 좀 줄이라고 했을 정도라니까요.”

젊은 나이에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요즘 그는 떡의 이론과 원리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또 지금보다 더 맛있는 떡을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다. 학창시절 학업과는 거리가 먼 그였지만 떡에 대한 공부만큼은 파고들수록 재밌다고 말했다.

이제 떡은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가 됐다. 그는 “남들 앞에 당당히 내세울 수 없었을 자신의 인생을 떡이 바꿔줬다”면서 “떡을 만든 뒤부터 어딜 가도 인정받고 있고, 지금처럼 인터뷰도 하게 돼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유명한 주방장이 돼 가게를 차리면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다 오잖아요. 저도 경기떡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떡’ 하면 모두가 제 이름을 떠올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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