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추천열락(推薦說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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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는 기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포숙(鮑叔)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반대진영에 속했던 옛 친구 관중(管仲)을 제환공(齊桓公)에게 추천하여 주군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주(覇主)로 만들었다. 관중은 그러한 포숙의 우정을 기리며 자신을 낳아주신 분은 부모이지만,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논어’의 첫대목은 공자의 인격을 가장 잘 표현한다.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기쁨(說)과 멀리서 찾아온 벗들과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樂)을 누릴 줄 알았으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을 서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군자라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군자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의 능력과 인품을 알아주고 그것을 기뻐하고 즐기는 사람이다. 북송의 소동파(蘇東坡)는 구양수(歐陽脩)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의 항주(杭州)인 전당(錢塘)으로 폄적되었을 때 그는 혜근(惠勤)이라는 승려와 가깝게 지냈다. 혜근이 시집을 내면서 서문을 부탁하자 소동파는 시에 대한 품평보다 그의 사람됨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서문이 있어야 반드시 시를 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면 혜근의 인격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한(漢)의 책공(翟公)이 파직되자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복직이 되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서운했던 그는 대문에 ‘죽어보아야 사귐의 정을 알고, 가난해보아야 사귐의 뜻을 안다. 파직된 후에 교제의 정을 알았네.’라는 글귀를 적어두었다. 소동파는 이러한 책공을 야박한 사람이라 지적하며 구양수의 예를 들었다. 구양수는 소동파의 능력과 인품을 누구보다 아낀 사람이다. 그는 한 마디라도 도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자기의 명성과 지위를 앞세워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구양수가 발굴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의 추천을 받고 명성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등을 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의 안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 등진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구양수가 실각하여 낙향했을 때 소동파는 대선배를 찾아갔다. 인재를 찾는 일에 심드렁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구양수는 여전히 훌륭한 인물이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책공의 문객은 생사와 귀천의 갈림길에서 은인을 등졌지만, 구양수가 추천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작은 이익을 두고 등지는 사람도 많았다. 책공은 문객들을 탓했지만, 구양수는 자신의 허물로 돌렸다. 소동파는 이러한 구양수를 책공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유학을 중시했던 북송의 권력층은 도가나 불교를 배척했다. 그러나 구양수는 시서와 인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존중했다. 승려였던 혜근은 구양수와 30년 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구양수가 세상을 떠나자 소동파는 혜근과 함께 문상했다. 이후에도 혜근은 구양수에 대한 말만 들어도 눈물을 흘렸다. 출가한 혜근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구양수를 따른 것이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뛰어난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파격적인 문장과 출신과 연령을 가리지 않는 개방적인 교류로 보수적인 양반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조금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산중에 사는 필자는 벗들과 인사동에 사랑방을 마련하고 수시로 만나 고금의 다소사를 논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우리가 모이는 사랑방은 연암이 벗들과 어울리던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연암은 이곳에 박제가를 자주 데리고 왔다. 연암은 나이로는 아들이나 진배가 없었던 서자 출신 박제가를 항상 칭찬하며 벗으로 여겼다. 박제가도 글을 지을 때마다 연암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북학의(北學議)’는 연암에게 보이기 위한 저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곳곳에 자신의 견해를 넘어서는 과격한 주장이 들어있었지만 연암은 오히려 탁견이라고 칭찬했다. 새로운 저술을 들고 박제가가 청계산에 은거하던 연암을 찾았을 때 그의 지기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박제가는 보여줄 사람이 없다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저술에 불을 지르고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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