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네”

근엄한 궐에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어 오가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어처구니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바야흐로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조약이 발효되던 날이다. 근정전을 배경 삼아 일장기가 버젓이 올라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  모형 근정전 (영공방 제공)

[글마루=김지윤 기자] 1년 가운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3월이다. 본격적으로 생명의 기운을 돋우는 봄의 알림에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겨울의 냄새가 난다. 바람 내음이 꽤 봄다워졌지만 말이다. 아직은 도톰한 옷을 입은 내외국인들이 경복궁 이곳저곳을 보느라 여념 없다.

궁 곳곳엔 봄을 알리는 생명들이 얼굴을 빼곰히 내밀며 방문객을 맞는다. 궁을 둘러본 이들은 단아하면서 화려한 근정전을 보며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부지런하게 정사를 돌보겠다(勤政)’란 신념이 건물 태(態)에서 묻어난다.

조선과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5대 궁 가운데 단아하면서 위엄이 느껴지는 궐은 경복궁(景福宮)이다. 오죽하면 이름마저도 복스러울까. ‘빛나는 복이 깃든 궁’이라니 의미부터 찬란하다.

사실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서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지었으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가장 큰 복인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이 위정자와 백성의 가장 큰 소망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바람을 고스란히 담은 건물이 ‘경복궁(景福宮)’‘근정전(勤政殿)’이다.

근정전은 어느 궁에서도 볼 수 없는 기품을 뿜어내고 있다. 근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 그래서 국왕의 즉위식, 세자 책봉식, 문무관의 조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 공식행사나 의례를 이곳에서 펼쳤다.

정종을 비롯해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등 여덟의 임금이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문무관의 조례는 월 4번 열렸다. 이때 한성에 거주하는 문무백관이 참여했다.

94년 전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다

▲ 1910년 일장기가 걸려있는 근정전의 모습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하늘과 가장 맞닿은 이들은 근정전 기와에 터를 잡은 삼장법사를 앞세워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등 어처구니가 아닐까 싶다.

고종 때 중건된 이래 한 세기 가까이 근정전과 함께하고 있다. 눈·비가 내려도, 햇볕이 내리 쬐어도 어처구니는 바지런히 전각을 지킨다. 조선 최고(最高)의 궐이기에 그들은 한눈을 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제 자리가 좋은지 여태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있다.

근엄한 궐에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어 오가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바야흐로 1910년 8월 29일한·일강제병합 조약이 발효되던 날이다. 근정전을 배경 삼아 일장기가 버젓이 올라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운 일이거늘 300여 년 후에 왜(倭)에게 국권을 빼앗기게 되니 당시 백성의 마음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이 침통했을 것이다. 이렇게 근정전엔 슬픈 사연이 있다.

자연과 어울리다

▲ 모형 근정전 만들기 (영공방 제공)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근정전. 이곳에서 더 이상 외국 사신을 맞지도, 경연을 베풀지도 않지만, 그 대신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중 대부분의 사람은 근정전이 자연과 어우러진 멋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축물로 왕의 품격을 고스란히 느끼고 가는 듯하다. 특히 근정문에 들어서 오른쪽 모서리에서 전각을 바라보면 북악산과 인왕산을 양옆에 끼고 듬직한 월대 위에 날개를 활짝 편 근정전의 팔작지붕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이러한 ‘뷰포인트(View point)’에 대한 감상을 함께 나눈 이가 바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다. 그는 답사객을 안내할 때 근정문 행각 오른쪽 모서리에서 근정전을 바라보게 한다고 한다.

근정전을 높이는 데 월대의 공로가 크다. 월대엔 벽사의 역할을 하는 어처구니, 십이지신상, 해태상과 함께 화재에 대비해 물이 항상 채워진 ‘무쇠드므’가 있다. 그리고 곳곳에 정교한 조각들이 근정전의 품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왕의 권위만 내세운 궐은 아니다.

다른 곳과 달리 잘 다듬어지지 않은 박석들이 가득한데 이는 그 사이사이에서 풀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며 생명의 존엄성을 느끼며 작은 미물일지라도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위정자는 백성의 작은 것 하나라도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이 곳곳에 담겨있다.

근정전엔 역사도 담겨있으나 조상들의 교훈과 지혜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손으로 직접 근정전 모형을 만들면서 그 정신을 되짚어 보는 것은 어떠할까.

(사진제공 영공방)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