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원 시인, 작곡가

 
바람이 분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가 좋다. 사람과 인연, 그것이 배태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감성적 사진과 함께 책을 쓰고 싶다. 그러나 단지 떠남이 주는 힐링만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 대한 따뜻한 호기심과 그렇게 만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절절한 혹은 쓸쓸한 마음을 오롯이 드러내고 싶다. 힐링이야말로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그 무엇인 셈이다. 스스로의 삶을 치유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슴 깊이 품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 치유, 즉 셀프 힐링에 몰입하게 되면 사회라는 큰 울타리는 항상 관심사 밖에 놓이게 된다. 지금, 여기 우리가 추구해야 할 힐링은 스스로의 삶을 일으켜 세우면서도,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가능하다는 사회적 힐링으로 거듭나야 할 때다. 살아갈수록 우리 사회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참으로 어렵고 힘들고 외롭고 쓸쓸하기만 하다. 나의 절망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 ‘내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 기층 민중들의 절망인가? 절망 속의 삶, 우리에게도 내일은 과연 있는 것인가?

퀴닝(여왕 되기, Queening)은 체스 용어다. 체스판의 가장 낮은 계급인 졸이 한 번에 한 칸 씩 전진해 상대편 진영의 끝에 도달하면 갑자기 환하게 빛나며 여왕으로 변신하는 컴퓨터 게임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1대 99의 빈부 양극화가 고착된 이 시대. 퀴닝은 컴퓨터 게임에서만 가능한 환상일 뿐인가?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사회 밑바닥을 떠돌며 그 사실을 몸으로 확인해 보았다. 그 노동체험 가운데 진도 꽃게잡이, 지방 국도의 주유소와 편의점, 아산 돼지농장, 춘천 비닐하우스, 당진 자동차부품 공장 등 수십 개의 현장 일자리에서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다 보니 죽을 놈은 뭘 해도 죽고 살 놈은 뭘 해도 반드시 살게 돼 있다. 운명론적 안전철학이 지배하는 엉터리 같은 지옥세상을 뼛속 깊이 체험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나와 함께 일하고 생활했던 사람 모두가 퀴닝적이라고 부를 만한 열망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종일 돼지 똥만 치우는 일보다 좀 더 깨끗하고 덜 힘든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밤샘 작업을 하지 않고도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는 벌고 싶은 것은 비단 나만의 사치일까?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신분상승을 할 수 있을까?

신들의 미움을 받아 언덕위로 평생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 그렇게 언덕위로 굴려 올리면 여지없이 돌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돌을 굴러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 헛된 일인 줄 알면서도 반복해야만 하는 시시포스의 운명을 고스란히 우리는 안고 살아간다. 어쩌면 줄무늬 애벌레에게 주어진 과제도 시시포스와 같이 헛된 일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어디론가 기어가는 다른 애벌레들에게 우리의 주인공 애벌레는 관심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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