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 “친구야 잘 가”… 60년 만에 이룬 화해

▲ 파주 금강사 행자인 묵개(본명 서상욱) 선생.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친구야, 잘 가. 저 세상에선 싸우지 말자.”

작은 유골 단지를 잡은 80대 노병의 손은 떨렸다. 지난해 경기도 파주시 ‘북한군/중국군 묘지(적군묘지)’ 재단장 현장에서 조우한 산자와 망자. 60여년 전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에 끌려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그들이었다. 이제 한쪽은 살아서, 또 한쪽은 유해가 돼 서로를 만났다. 노병이 총 대신 적군의 유해를 품은 건 화해의 손짓이자 작별인사였다. 노병은 “친구야, 좋은 데 가라. 나도 곧 간다”고 말했다.

파주 금강사에서 만난 묵개(黙介, 본명 서상욱) 선생의 기억은 이처럼 생생했다. 화해의 현장을 지켜봤던 그는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것이 ‘평화’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묵개 선생이 특히 감동한 건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6.25 참전전우회 등 일부 단체의 몇몇 회원들은 북중군 묘지 재단장 추진에 반발했다고 한다. 이들은 북중군 묘지에서 위령 봉사를 하는 묵개 선생을 향해 “그렇게 시간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유엔군 묘지에 가서 위령을 하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묵개 선생은 “자신과 싸우다가 죽은 적에게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는 게 진정한 용사”라고 설득했는데, 이 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는 “분노와 적개심을 버린 그들은 적군의 벌초와 재단장을 돕는 과정에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라며 “나는 그것을 내 눈으로 봤고, 같이 행동했던 사람이기에 세상에 전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북중군 묘지가 남북 화해의 좋은 소재가 된다고 주장하는 그는 “할 수 있는 한 이 일을 계속하겠다”며 “발굴되지 못한 유해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죽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북중군

북중군 묘지는 6.25 전쟁 때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를 안장한 곳이다. 서부전선 최전방이었던 경기도 파주에 있다.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지난 1996년 6월 조성됐다. 총면적 6099㎡(약 1845평)인 이곳엔 총 1102구의 유해가 묻혔다. 무장공비나 수해 때 떠내려온 북한인도 포함돼 있다. 이들 묘비는 모두 북한의 개성 송악산 쪽을 바라본다. 살았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고향을 그토록 바랐을 터다. 그러나 북중군 묘지에 안장된 이들도, 산야에 파묻혀 있는 이들도 모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다. 북한과 중국이 모두 유해 인수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은 남파 무장공비의 경우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유해 송환이 어려운 상황이다.

▲ 묵개 선생이 19일 경기도 파주시 북중군 묘지(적군묘지)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적군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금강사 ‘묵개 선생’, 적군 전사자 위로에 투신

금강사의 행자인 묵개 선생이 북중군 전사자 위령에 몸을 던진 것도 이들의 딱한 처지 때문이다. 그는 매일 밤 북중군 묘지에서 이들을 위로하는 천도재를 지낸다. 홀로 묘지 이곳저곳을 돌며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매서운 한겨울에도 천도재를 멈추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그가 자청하고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지난 2011년 10월 금강사에서 열린 음악회가 사건의 발단이었다. 묵개 선생의 한 은사가 희수(喜壽, 77세)를 맞아 금강사에 초청됐다. 희수 잔치에선 한시(漢詩)에 재즈 연주를 접목한 음악회가 펼쳐졌다. 재즈 소리는 그날 밤 파평산 일대에 울려 퍼졌다. 다음날부터 묵개 선생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예불 때 보니 처참한 모습의 혼령들이 마당에 가득했다는 것이다. 순간 6.25 전사자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는 “영혼을 울린다는 재즈 음악회가 이들의 영혼을 깨우는 초혼제가 돼버린 것이었다”고 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묵개 선생은 다른 사찰로 도망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곳까지 그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람은 “이제 위로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위로할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파주 ‘적군묘지(북한군/중국군 묘지)’ 관련 보도를 접하고 수소문한 끝에 그 장소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묘지에서 108일 기도를 시작했다. 지난해 2월의 일이었다.

▲ ‘북한군/중국군 묘지’의 예전 모습(왼쪽)과 지난해 재단장한 후 현재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혼령들에 약속한 묘지 재단장

묵개 선생의 눈에 처음으로 비친 북중군 묘지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작은 봉분에 꽂힌 나무 묘비는 이빨이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다. 여름이면 묘지 곳곳에 물이 고이고 잡초가 무성했다. 그는 “심약한 사람은 무서워 묘지에 가지도 못했다”며 “애기무덤 같았고, 언덕도 장마 때 떠내려가기 직전이었다”고 설명했다. 혼령들에게 묘지 재단장을 약속했던 묵개 선생은 자신이 활동 중이던 북중군묘지평화 포럼 회원들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포럼 대표인 권철현 전 주일대사는 국방부에 묘지 재단장을 공식 건의했다. 묘지 문제가 공론화하자 국방부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5억 원의 예산을 들여 묘지를 개선한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그는 우연의 일치가 아닌 어떤 ‘영적인 힘’에 의한 일이었다는 믿음을 숨기지 않는다.

묵개 선생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파평산 일대 땅 소유주의 유지를 따라 설립된 금강사가 후손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집행일인 지난해 5월 11일 100여 명의 철거반과 250여 명의 경찰병력이 들이닥쳤다. 속수무책이었다. 묵개 선생과 금강사 승려, 그리고 신도들은 예불을 하기 시작했다. 종교의 힘으로 맞설 생각이었다. 그때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대기 중이던 철거반 중 일부가 “스님을 지켜드리겠다”며 대열에서 이탈했다. 포크레인 기사 중 한 명도 작업복을 벗어 던졌다. 예불이 길어지고 시간만 흐르자 집행관은 철수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금강사는 무사했다. 묵개 선생은 이 사건 역시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다. 땅 소유주의 혼령이 움직였을 것이고,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가장 큰 절박함을 가진 북중군 묘지 혼령들이 지켜줬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의 향후 계획 중 하나는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령탑을 세우는 일이다. 그동안 발굴하지 못한 남북한 군인과 민간인 전몰자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유해도 찾지 못한 그들을 위해 신앙인과 수행자로서 위령을 하고 불교식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일로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60년, 이 60년이 동양에선 한 세기다. 이제 이유 없이 죽어간 전몰자의 한을 풀고, 이를 계기로 진정한 남북한 화해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묵개 선생은 말한다. 북중군 유해 발굴과 안장이 제18대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함께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트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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