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마리나 되는 용머리가 2층으로 돼 있는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다. 지붕 위에 있는 용까지 합치면 용머리는 모두 15마리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매년 1000여명이 찾는 인기명산
곳곳에서 역사의 흔적 볼 수 있어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도심 한복판에서 수려한 경관으로 한 폭의 산수화를 자랑하는 도봉산(道峰山). 서울시 도봉구에서부터 의정부시, 양주시까지 이어지는 이 산은 높이 739.5m로 매년 1000여 명이 찾는 인기명산이다. 산중에는 제일 오래된 건축물인 천축사(天竺寺)를 비롯해 망월사(望月寺)·쌍룡사(雙龍寺)·회룡사(回龍寺) 등 60여 개의 사찰이 있다. 하얀 눈이 내린 다음 날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봉사(道峰寺)’를 찾았다.

◆매력적인 매력 뽐내는 산지사찰
지하철 1호선 의정부행을 타고 도봉산역에 내려 141번 버스를 타도봉산입구역에 내렸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많은 등산객이 가는 방향으로 쭉 따라가면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뽀드득, 뽀드득” 추운 날씨 탓인지 몇일 전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길은 미끄러웠다.

도봉산 입구에서 3분쯤 걸으면 3갈래 길이 나오는데 이 중 작은 다리를 건너는 쪽으로 오르다 보면 얼마 되지 않아 능원사가 나온다. 능원사를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담에 그려진 벽화가 보이는데 이는 도봉사 입구임을 뜻한다. 입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찾기 어렵지 않다.

담에는 불상벽화와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심우도 또는 십우도(十牛圖)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의 소를 길들이는 데 비유해 10단계로 표현한 것이다. 불교계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불성(佛性,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근본 성품)이 있는데 그림에는 불성이 소에 빗대어 표현됐다.

길가에 있는 벽화는 등산객과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벽화를 구경하고 경내로 들어서니 산지사찰(山地寺刹)만의 고요함이 방문객을 반겼다. 경내에 있는 나무들은 한국무용을 하는 무용가의 손끝처럼 뻗어 있었다. 이와 함께 미처 녹지 못한 눈과 불상들이 어우러져 겨울 사찰의 매력을 뽐냈다.

▲ (시계방향으로) 도봉사 대웅전 안에는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기준으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불상이 있다.도봉사 대웅전 앞에는 부처의 진신사리(석가모니나 성자의 유골) 3과를 모시고 있는 5층인 뿌리탑이 있다.능원사를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담에 그려진 벽화가 보이는데 이는 불상벽화와 심우도(尋牛圖)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불교의 근본 사리 담은 뿌리탑
그 길로 곧장 올라가다 보면 돌로 된 뿌리탑과 함께 대웅전의 모습이 보인다. 도봉사에 따르면 5층인 이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석가모니나 성자의 유골) 3과를 모시고 있는데 부처를 기리는 뜻과 불교의 근본인 씨앗을 심은 석가모니의 사리가 있어 뿌리탑이라 칭했다. 사리 3과가 도봉사로 옮겨지기까지는 한국외국어대 부총장 최장성 교수의 노고가 있었다. 최 교수는 1982년 3월 28일 태국국립사원 왓벤자마버의 종정 프라풋타부니윙(Prabuddhamunjwong)을 초빙해 전법법회를 원각회에서 연 후 태국에서 한국으로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옮겼다.

앞뒤좌우로 여러 불상이 조각된 탑은 아기자기한 멋을 냈다. 전면에 있는 석가여래좌상이 방문객을 반겼다. 둥근 기단 위에 1층에는 동쪽에 관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모니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을 새겼다. 1층 속에는 부처의 사리 3과를 조각했고 외곽에는 십육나한이 둘러 있다.

◆악마를 누르고 있는 철불좌상
고개를 돌려 많은 용머리 조각이 달린 대웅전을 봤다. 다른 대웅전과 달리 13마리나 되는 용머리가 2층으로 돼 있는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다. 지붕 위에 있는 용까지 합치면 용머리는 모두 15마리다.

도봉사 대웅전 안에는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기준으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불상이 늠름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석가모니불 앞에는 서울지역에서 보기 드문 고려 시대 초기 철불좌상이 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도봉사 철불좌상 제151호인 이 불상은 118㎝의 중형 불상으로 같은 시기 장신(長身) 계열의 대표적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7년경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광복 직후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으로 이동했다가 도시계획으로 자명사가 철거됨에 따라 도봉사로 옮겨왔다.

철불좌상의 손 모양은 악마를 누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불상 얼굴의 심오한 표정과 잘 어울린다.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옷을 입은 양식에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옷깃이 어깨 위에서 세모꼴로 나란히 세 번 접힌 점, 왼손 팔목 안쪽의 타원형 주름, 대의(설법할 때 입는 겉옷) 아래 군의(속옷)를 묶은 띠와 무릎 앞에서 부채꼴로 퍼져 나간 옷자락 등에서 고려 초기 불상의 전형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어 고려 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도봉사는 고려 4대 임금 광종에 의해 국사로 임명된 혜거스님이 창건했다. 도봉사에 따르면 이 사찰은 고려 8대 임금 현종이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된 뒤 국사를 돌보기 위해 이 사찰로 피신했으며, 육성(六城)을 지키기 위해 대장경 제작에 착수하여 6000권 대부분을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후 도봉사는 전쟁과 종교분쟁,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다가 1961년 벽암스님에 의해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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