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선 용산도서관 사서

밭일로 뭉뚝하고 까실해진 손
엄마의 힐링법 뒤란에 작약꽃

▲ 정경선 용산도서관 사서
날이 무딘 손톱을 깎고 갈무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옷이 긁힌다. 손톱 가장자리를 다듬는데 손가락 관절이 불거지고 끝이 뭉툭하면서도 정갈하고 부지런한 엄마의 고사리 손이 떠오른다.

엄마의 배경은 주로 ‘들’이었다. 게으르게 낮잠을 즐기거나 시답잖은 농담으로 수군대며 남을 헐뜯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엄마에게는 오로지 금쪽같은 햇살이 당신의 곡물과 채소, 감과 호두를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입학식이나 운동회에 단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그런 것 같다. 갑자기 비가 와서 우산 없이 하교해도 마중 한 번 오지 않은 것을 봐도 분명 그런 것 같다.

1960년대에 우리 가족은 농촌에서 살았는데, 교사였던 아버지는 월급을 타서 꼬박꼬박 토지를 사들였고, 농사일은 오롯이 엄마 몫이었다. 엄마의 논일과 밭일은 끝이 없었다. 메마른 집터를 기름진 밭으로 바꾸는 수년간 엄마의 고생은 그야말로 개척자의 그것과도 같이 눈물겨워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집보다는 논이나 밭에서 일하고 있는 때가 더 많았다. 우리 집 앞마당 우물 옆에도, 뒷마당에도 터를 돋워 만든 텃밭에 오이, 호박, 도라지 등을 키워 살림을 풍족하게 일구었다. 염소와 닭도 키웠다. 닭 모이를 주고 밤에는 닭장으로 모아들이고, 염소를 들판에 내몰고 저녁에 몰고 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고 딴딴한 염소 뿔에 박힌 적도 수차례였다. 요즘도 길가에 파릇한 풀을 보면 염소가 한 마리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눈이 내리면 엄마의 지시에 따라 보리밭 밟던 생각도 나고, 언니와 함께 장다리꽃이핀 밭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던 생각도 난다.

난 어릴 때 좀 재롱둥이였던 것 같다. 밭일하는 엄마와 언니 옆에서 이런 저런 사투리나 라디오에서 들은 우스갯소리를 흉내 내면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 준 걸 보면….

산골의 깊은 겨울밤에 온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화롯가에 둘러 앉아 고구마, 감말랭이, 홍시를 먹노라면 등이 가렵기도 하였다. 그럴 때 엄마에게 등을 내밀면 까실까실한 손으로 긁어주곤 하셨는데 딱 맞춤하게 시원하고 만족스러웠다. 기실 엄마의 손은 겨울을 제외하면 굳이 손톱깎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늘 뭉툭해서 원래 엄마 손은 그런 줄 알았다.

고대머리를 하고 공단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찍은 흑백사진을 보고서야 엄마 손이 길쭉하고 멋스러웠다는 걸 알았다. 이모가 우리집에 와서 묵던 날 엄마가 유난히도 웃음이 많고 수다스럽다는 걸 알았다.

우리 동네에서 맨 처음으로 초가집을 헐고 양옥으로 상량식을 할 때 우리 엄마가 노래를 곱게 잘 부른다는 걸 알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뒤란에 가꾸던 작약꽃이다. 겨울을 잘 견딘 작약 뿌리가 꽝꽝 언 땅을 뚫고 새싹을 틔우고 꽃부리를 내밀고 마침내 함박 웃음 같은 작약꽃을 피우는 걸 보며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엄마가 부린 가장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당신만의 힐링법이 아니었을까?

아무렇든지 엄마의 농삿일은 도시로 이사를 하면서 끝났지만, 아파트 베란다 같은 공간에도 늘 무언가를 기르는 습성은 변함이 없었다.

3년 전에 고향을 떠난 지 근 30년 만에 내 고향집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중학교 때까지 살던 옛집을 찾지 못해서 당황했다. 엄마의 청춘이 일궈놓은 논과 밭을 기억에서 불러내는 데 한참 걸렸다. 추억속의 고향마을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고, 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앞산이 어느 방향에 있었는지, 복숭아 과수원로 가는 길 섶의 옹달샘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중년의 삶은 어찌 이리도 피곤한지, 만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세상의 삶을 엄마에게 다 일러바치고 싶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돼버렸다. 골다공증이 심해지면서 침상에서 지낸 삶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엄마는 그 고단하고도 근면한 ‘들’의 생애를 얼마간은 그리하지 않았을까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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