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진나라 2세 황제 호해는 조고와 상의하여 눈에 거슬리는 대신이나 왕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전국 순행에서 함양으로 돌아온 황제는 시황제 때 중단된 아방궁 공사를 시작했으며 전국에서 장사 5만 명을 징집하고 각 군, 현에서 군용 가축들의 사료를 징발했다.
게다가 수송에 징발된 농민들의 식량은 스스로 부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함양을 중심으로 주위 3백리 이내의 농촌은 심각한 식량난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법령은 더욱 가혹하게 집행되었다.
그 해 7월에 접어들자 마침내 초나라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변경 수비군에 동원된 진승이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장초(張楚)란 국호를 내세우고 스스로 국왕을 자칭하고 진에 거점을 두어 각지의 장병을 모아 세력을 넓혀 나갔다.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리던 산동의 각 군과 현에서도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고을의 수, 위, 영, 승을 죽이고 진승에게 호응하여 제각기 후 혹은 제를 자칭하며 진나라를 쳐부수자는 기치 아래 연합을 했다. 이 세력들은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
한편 진나라 조정에서는 알자(궁중 빈객의 접대나 사자로 파견되는 관리)의 한 사람이 동쪽에서 돌아와 반란의 실정을 보고했다. 그러나 호해 황제는 이를 믿지 않고 오히려 옥리에게 넘겨 버리고 말았다. 곧 전선에서 사자가 도착했다. 호해가 그곳의 실정을 묻자 사자는 꾸며 대었다.
“한낱 떼도둑에 지나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군의 수, 위 등이 그들을 잡아들이고 있으니 지금쯤은 완전히 소탕되었을 것이니 심려를 놓으십시오.” 호해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조에서는 무신이 일어나 왕이 되었다. 위에서는 위구가, 제에서는 전담이 왕을 지칭했다. 다시 패에서도 패공(한나라 시조 유방)이 일어났고 회계군에서는 장량이 군사를 일으켰다.
호해 황제 2년 겨울. 진승의 부하 주장이 거느린 반란군이 함곡관을 넘어 회 땅까지 나아가서 수도 함양을 위협했다. 그 군사들은 무려 10만 명을 헤아렸다. 크게 당황한 호해 황제는 대책을 물었다. 그 때 소부 장한이 건의했다.
“적들은 이미 인근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숫자도 많고 몹시 날쌘 놈들입니다. 이제는 이 부근의 장병들에게 동원령을 내려도 때를 맞춰 오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역산에는 능의 노역에 동원되었던 죄수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을 석방하여 무기를 주고 싸우게 하심이 어떻습니까?”
호해는 대사령을 내리고 장한에게 죄수 부대의 지휘를 맡겼다. 장한은 반란군 주장의 군대를 맞아 싸워 이를 무찌르고 도망가는 주장을 뒤쫓아 마침내 조양에서 붙잡아 죽였다. 호해는 다시 장한의 보좌로서 장사 사마흔과 동예를 보내 다른 반란군을 공격하게 했다. 반란군은 패주하던 끝에 진승은 성보에서 죽였으며 항량은 정도에서 패하였고 위구는 임제에서 죽었다. 초나라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지도자들과 함께 패하자 장한은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를 건너 조왕 헐이 할거하는 거록 지방을 공격하였다. 반란은 어느 정도 평정이 되었다.
그즈음 조고가 호해에게 건의했다.
“선제의 위엄 앞에서는 신하들이 누구 하나 법을 어기지 못하였고 사설을 늘어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공경들과 더불어 조정에서 정사를 보시는 일이 과연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결재하시는 일에 착오라도 생기는 경우에는 그것이 폐하의 잘못임을 신하들 앞에 드러나는 결과가 됩니다. 원래 천자가 ‘짐’이라고 칭하는 것은 징조(짐)를 보인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폐하께서는 대신들 앞에 모습을 나타나시지 않음은 물론 목소리도 들려주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그로부터 호해는 궁중에 틀어박힌 채 오직 조고만을 상대하여 나랏일을 보게 되었다. 대신이라 할지라도 조정에서 황제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마침 승상 이사가 황제를 만나고 싶다고 조고에게 말하자 그는 요령을 부려 오히려 자신의 비천한 출신 성분을 앞세워 교묘하게 승상의 목적을 무산시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