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찬 행복드림전통문화예술원 대표

▲ 김윤찬 행복드림전통문화예술원 대표
늘 내가 필요로 할 때 아무런 바람도 없이 묵묵히 지켜봐 주시던 아버지이시다.

어려운 형편에 우리 막내는 하고픈 것 다 하게 해주시겠다며 1년에 한 달 겨우 집에 들어오시며 전국, 해외로 일을 다니셨다. 나라면 아버지처럼 할 수 있었을까?

최근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날까지 70년이란 세월 동안 아버지는 한결같이 새벽 4시 일어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나면서부터 나의 아침이 빨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끔 휴가니 월차니 평일 휴일이 생겨도 쉬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학교도 많이 바뀌고 직업도 여러 번 바꾸고 사업 부도도 많이 냈던 나.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으셨다.

늘 내 곁에서 본인이 힘겹게 망치질 하신 손으로 버신 돈으로 용돈도 주시고 빚도 값아 주셨다. 가끔 의기소침해져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시면 “남들이 다 하는 거 아니니 열심히 해봐”라고 하시며 늘 힘이 되는 말을 해주셨다.

그런 아버지가 위암 3기 판정을 받으셨다. 날벼락이었다. 왕따 방지 서명운동 한다고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기차에서 의사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나름 효도한다고 칭찬받고 나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큰 걱정 없이 아버지의 종합 검진을 신청했던 터였다.

그런데 암이라니. 늘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큰소리만 쳤던 아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위가 헐어서 그렇다고 입원하시라고 했단다. 서울역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집에 오니 저녁이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시고 다음 주 공사가 있어 일을 가야 엄마 용돈주고 겨울 버틴다고 가방을 정리하고 계셨다. 바보처럼 울 것 같았지만 이제는 막내가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해드릴 때였다.

나 자신의 위안이 아닌, 진심으로 아버지 입장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결론을 냈다. “아버지 일 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 위암이래요.” 1주일치 받은 약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시려던 아버지도 이미 눈치가 있으셨다.

암이라고 선고를 내리는 아들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이셨다. 어머니는 그런 말을 오자마자 해대는 아들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거짓말 하기보다 아버지한테 이야기 하는 것이 옳을 듯해서요. 그리고 아직 희망이 있다니까 아들하고 한번 같이 암하고 싸워 봐요.”

그날 이후 입원수속, 검사, 수술비 마련, 보험처리 등 나에게는 폭탄 같은 일들이 쏟아졌고
암에 좋은 음식, 약 등 신경 쓸 것이 많아졌다. 멀리 있으면 부모도 멀어진다 했던가. 막상 일이 터지니 분가한 가족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수술 날짜가 돌아왔다. 5시간 동안 진행되는 대수술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1시간 이내에 나오면 수술 못하고 나오는 거란다. 1분 1초 숨이 턱턱 막혀왔다.

기다리다 초초해 병원 밖으로 나오니 서울에 첫눈이 온다. 엄청 쏟아지는 눈을 보며 수술이 잘 될 거란 좋은 징조일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5시간이 꼬박 지나서야 의사가 수술실로 보호자를 불렀다. 수술실로 들어서자 녹색 보자기가 보인다. 암 덩어리와 함께 까맣게 녹아버린 아버지의 절개된 위가 담겨있었다.

의사 말로는 위의 90%를 잘라냈다고 한다. 의사선생님은 수술 결과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시커먼 암 덩어리만 눈에 들어왔다.

평소엔 피 한 방울 보지 못하는 나였지만, 그 암 덩어리는 아직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의 가슴이 저렇게 새까맣게 타는 동안 도대체 난 뭘 한 걸까.

평생을 밖에서 살다시피 하시며 집에서 밥 한 끼 제대로 못 드시고 석면이나 공사장 안 좋은 약품을 다 맞아가며 키운 막내아들. 그 대가가 저 암 덩어리였다.

 
너무 가슴이 아파 펑펑 울고라도 싶었지만 곁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울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주시는 김밥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회복실로 가시는 아버지를 보고 밖에 나오니 눈이 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30분 동안 내리는 눈비속에 눈물을 감추며 맘 편하게 울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수술 후 조금씩 몸을 추스르셨다. 며칠을 꼬박 병간호를 하면서 아들에게 다시 한번 잘 해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아버지가 너무 고마웠다.

이제 정말 아버지께 힘이 되어드리는 아들이 되고 싶다. 아버지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곁에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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