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월 복원된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 ⓒ천지일보(뉴스천지)
아펜젤러, 인천 선교 터 닦아
조원시, 내리교회 건물 세워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이는 1885년 4월 5일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enzeller, 1858~1902)가 한국 제물포항 상륙 직후 기도한 내용으로 알려졌다. 당시 아펜젤러 선교사는 미국 감리교 선교 위원회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그의 아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와 함께 동방의 해 뜨는 나라 한국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인천에 발을 들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정치적 불안 등 여러 이유에서 서울로 가지 못하고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가 두 달 뒤인 6월 20일 다시입국했다. 이후 7월 29일 서울로 입성하기 전까지 38일간 지금의 내리교회 주변에 머물렀다. 인천에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어 학습, 오르간 연주, 제풀포항 주변 당사 등으로 분주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감리교회에서는 이 종교 활동을 선교의 시발점으로 보고 내리교회의 초석으로 삼고 있다.

▲ 1901년 12월 25일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 본당 낙성 및 입당예배 기념사진. (사진출처: 내리교회 홈페이지)
◆한국서 열정 불사른 조원시 목사
초창기 내리교회를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내리교회 제2대 목사인 조원시 목사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조원시 목사의 본명은 조지 헤버 존스(Gorgeh. Jones, 1867~1919)다. 1988년 5월 20세의 나이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어를 빠르게 습득한 그는 배재학당에서 수학 등을 가르치면서 아펜젤러를 돕는 일로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선교회 서기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됐다. 그는 청년 특유의 열정으로 교육과 전도 등 선교활동에 젊음을 불살랐다. 1892년 조원시 목사는 부인 존스 선교사와 함께 인천 지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설립했다. 개교 당시 학생 수는 한 명이었으나 1905년 47명으로 늘었다.

이 학교에선 수신(도덕)‧국어‧한문‧일어‧산술‧지리‧국사‧서예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학교는 부인 존스 선교사가 전적으로 맡아 운영했으며 조원시 목사는 강화‧연안‧해주‧남양 지방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01년 현재 내리교회 위치에 십자가형 벽동 예배당을 지었다. 이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했다.

▲ 아펜젤러 선교사 흉상. ⓒ천지일보(뉴스천지)
◆계단 위에서 만난‘ 한국사랑’ 3명의 목회자
서울역에서 수도권 지하철 1호선 동인천행 열차를 타고 1시간 정도 달리면 인천 끝자락에 도착한다. 동인천역 2번 출구에서 내려 직진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4번째 오르막길이 나온다. 바로 인천시 중구 내동 9번지 인천 내리교회다. 근처에 인천항이 있어서 바다 내음이 물씬 밀려오지만 교회 주위엔 높고 낮은 건물들로 빼곡히 둘러 쌓여있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인천내리교회라고 간판을 단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적벽 돌로 된 건물 옆으로 계단이 있는데 오른편에 머릿돌 4개가 눈에 띈다. 이 머릿돌은 각기 다른 크기이며 각각의 건축연도가 적혀 있다.

다시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을 오르면 흉상 세 개가 방문객을 반긴다. 이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한국인 최초 목회자인 김기범 목사, 조원시(존스) 목사의 흉상이다. 이들의 근엄하고 그윽한 표정에서 한국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느낄 수 있다.

◆57년 전 그 모습‘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
내리교회의 하이라이트는 본당이 아니다. 계단에서 내려와 교회 위쪽으로 올라가면 후문이 나온다. 그 길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복원된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이 나온다. 이 예배당은 지난해 9월 복원됐다. 1901년 설립된 이후 더 큰 성전을 짓는다며 허문지 57년 만이다. 예배당은 전체면적 294㎡ 높이, 9.89m(종탑 포함 11.6m), 지상 1층 규모로 과거 사진과 기록물의 고증을 통해 복원됐다. 외관으로 보기에도 과거 사진 속 내리교회와 흡사했다. 예전의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처럼 지붕과 내부 구조도 십자가 모형이다.

예배당 입구에는 ‘AD 1901’ ‘우리 선조의 신앙을 복원하며-주 후 2012’ 두 가지 머릿돌이 있다. 예배당 종탑에 걸려 있는 종은 처음 건립 당시에도 이 예배당에 매달려 있었던 무쇠 종이다. 이 종은 전쟁무기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놋그릇, 숟가락, 교회 종 등을 강제 몰수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숨겨뒀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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