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시민들이 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전통시장 고집하는 이유는
설날 기획 상품·세일 품목 없어도 情 있어
“믿을 수 있는 재료·고르는 재미 쏠쏠해”

[천지일보=장수경·이솜 기자] “나 참, 쪽파 한 단을 4000원에 사보긴 처음이네!”

우순례(가명, 80,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할머니는 지난해까지 7년간 시장에서 나물 등을 팔던 상인이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자신만한 배낭을 메고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을 찾은 우 할머니는 음식 가격이 비싸졌다며 연신 불만을 토했다. “설날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어? 애들 오면 밥이나 차려줘야지. 좀 비켜봐, 실고추 조금만 줘요. 우리 딸내미가 나박김치를 아주 좋아하는데 거기에 좀 넣어야겠어.” 잔뜩 찡그렸던 우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시장마다 “비싸다”는 소비자들과 “안 팔린다”는 상인들의 볼멘소리가 넘쳐난다. 국내·외 경제 악화로 소비자들의 지갑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 탓도 있겠으나, 지난해에 이어 올해 자연재해·기온이상 등으로 인한 생태계 축소와 식재료 공급의 불균형 문제도 크다.

이 같은 경제침체는 가장 큰 명절이자 전통시장 최대의 성수기인 설 대목에도 모두를 울상 짓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설을 앞두고 직접 만나본 상인들과 소비자들의 모습 속에선 과거부터 변하지 않는 명절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남아있었다.

▲ 지난달 27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시민들이 수산물을 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새끼를 다 잡으니 물고기가 더는 없어… 그러니 비싸지”

“아가씨,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어? 회 싸게 드릴게 먹고 가.”

지난달 28일 찾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노량진수산시장.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1번 출구와 이어진 통로로 들어온 시장에는 ‘호객 행위를 하지 말자’는 LED 전광판과 함께 버젓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상인들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었다.

소비자와 눈만 마주친다 싶으면 사방에서 회 좀 먹어보라며 부르는 상인들의 외침과 물소리, 눈길을 사로잡는 여러 종류의 수산물까지 시장 안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인적이 뜸한 자리의 상인들이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0년 전엔 여기 앞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날 받아온 수산물들이 금방 동났지. 지금은 다 옛말이야.”

최경석(가명, 65, 남)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설 대목에 앉아서 일을 해본 기억이 없다. 쉴 틈 없이 손님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장사가 부진한 이유로 “일단 값이 다 비싸졌다”며 “수산물들이 예전처럼 많이 나오질 않으니까 값이 자꾸 뛴다.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 물고기를 씨부터 잡아들이고 공급이 점점 줄게되는 것”이라는 원인분석을 내놨다. 신 씨는 이어 “여기(노량진수산시장)에서도 아직 덜 자란 것들은 받질 말아야 하는데 돈 때문에 다 받는다. 이 때문에 2년 사이에 약30% 이상 가격이 올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오후 8시도 안 된 시간, 가게를 마감하고 있던 신진이(가명, 71, 여) 씨는 설날 이야기를 꺼내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식들이 손자손녀를 데리고 와도 장사는 해야 된다. 오늘처럼 장사가 잘 안되면 저녁엔 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라며 다시 한 번 웃어보였다.

▲ 지난달 29일 경동시장에서 시민들이 식재료들을 살피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비싸긴 해도… 설날이잖아요”

“무슨 동태 하나에 만 원이나 해? 좀 싸게 해주쇼.”

자꾸만 치솟는 물가에 소비자들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29일 오전에 찾은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과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은 배낭을 멘 할머니·할아버지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지붕이 생기고 리모델링을 하는 등 시장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었으나 미리 사둘 제수용품을 꼼꼼히 살피는 소비자들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조순애(76,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할머니는 생선가게 앞에서 가격을 깎아달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조 할머니는 “반찬거리도 사면서 제수용품 가격도 미리 보고 있는데 값이 너무 비싸서 올핸 도저히 살 만한 게 없다”며 “지금도 가격이 비싼데 설날쯤이면 가격이 훨씬 뛸 것이 아닌가. 이 동태도 원래 5천 원 정도 해야 살까말까 했는데, 그새 두 배로 뛰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조 할머니는 마트가 아닌 전통시장을 고집한다고 말했다. 전통시장의 가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실제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이 전국주부교실중앙회를 통해 전통시장과 대형마트 각 36곳을 대상으로 가격 조사를 실시한 결과, 올해 설 차례상(4인 가족 기준) 재료를 전통시장에서 구매할 경우 14.6%(3만 7804원)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총비용은 전통시장이 평균 22만 680원, 대형마트는 평균 25만 8484원이었다.

▲ (사진출처: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 ⓒ천지일보(뉴스천지)

그럼에도 시장을 이용하고 있던 대부분의 손님들이 ‘식재료 값이 비싸졌다’는 원성은 괜한 불만이 아니었다.

시장에 물건을 나르던 최병선(가명, 55, 남, 서울 종로구 부암동) 씨에 따르면 1~2달 전만 해도 미나리 한 단과 파 한 단이 각각 3000원, 2500원이었는데 모두 5천 원으로 뛰었다. 최 씨는 “자연재해와 날씨 영향이 크다”며 “설 준비하러 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다들 재료를 선뜻 사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최 씨의 말처럼 재료를 선뜻 고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유나연(33, 여,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씨는 이날 제수용품 가격대가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을 하기 위해 시장에 왔다고 했다.

유 씨는 “설 지내는 데 선물 값까지 해서 약 50만 원 정도 생각하고 있다”며 “다른 때보다 비싸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설 아닌가. 상인도, 소비자도 경제적으로 다 힘들 때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 씨는 이어 “마트에선 설맞이 기획 상품이니 세일이니 해서 팔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 비싸고 품질도 안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쪽에선 양복을 말끔하게 입은 오대종(67, 남, 서울 성동구 응봉동) 씨가 능숙하게 시래기를 골랐다. 양손은 이미 마른 복어, 노가리, 나물 등 식재료들로 가득했다.

▲ 지난 28일 경동시장에 놓여져있는 먹거리들. ⓒ천지일보(뉴스천지)

오 씨는 “요즘은 남성이 집안일과 요리를 다 해야 하는 시대다. 특히 나 같은 노인들은 잘해야 한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3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전통시장을 들렀다는 오 씨는 자칭 ‘전통시장 팬’이다. 가게들을 하나하나 지나며 과일 냄새를 맡고, 나물을 조금 뜯어 직접 씹어보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는 “가격도 싸지만 시장 자체가 정말 좋지 않나?”라며 “봐라. 이 쌀에선 묵은내가 하나도 안 난다. 마트에서 팩으로 나오는 것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쌀 몇 톨을 입에 넣었다.

이렇듯 전통시장을 사랑하는 오 씨도 시장에 바라는 점이 있었다. 바로 주차장이 좁고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것. 오 씨는 “이 시장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려면 우선 주차장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설날 이야기를 꺼내니 오 씨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이렇게 신선한 재료로 우리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을 그대로 해주면 설날에 온 손주들이 정말 좋아하거든. 사는 게 팍팍해도 사람 냄새나는 시장 와서 전문가(상인)들이 추천해주는 것을 고르고 손주들한테 요리해주는 재미로 설날이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겠어? 사장님, 곰치 한 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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