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새해 하고도 한 달이 지나갔다. 올해는 제발 다툼과 분쟁 그리고 전쟁보다 소통과 화합 그리고 평화를 노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 어느 해보다 간절하다. 놀라운 것은 이 평화는 종교,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독교의 근본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기독교의 교파와 교단에서부터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비롯되는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봐도 그러하며, 오늘날의 기독교 현실을 둘러봐도 다르지 않다. 종교 통일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램을 뒤로하고 지난달 새해 벽두부터 한국교회100주년기념회관 대강당에서는 소위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이라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변절한 신흥단체가 작심하고 한국교회의 분열과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온 나라 안팎이 출범할 새 정부와 함께 새 역사 창조를 위해 소통과 화합을 외치는 마당에 안타깝게도 유독 한국기독교 지도자들만의 수준 이하의 생각과 의식과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추태의 현장이기도 하다.

선포된 내용을 살펴보자면 참으로 가관이란 말 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

원래 우리나라 기독교 보수층을 대표하는 단체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 태생부터 정치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 한기총에는 한기총과 하나가 되지 않는 교단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핍박하고 배척하는 이단대책위원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 조직의 책임자로 최삼경 목사가 있었다.

그러다 최목사는 예수의 월경잉태론과 삼신론으로 인해 한기총으로부터 이단자로 분류됐다. 그럴 때, 한기총 권력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합동 측과 통합 측의 권력과 명예와 삯을 위한 기싸움이 시작되면서 쌍방 간에 느닷없는 이단논쟁이 시작됐고, 결국 두 교단은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깊은 골만 남기고 현재의 한기총과 한교연이라는 두 개의 한기총 즉, 두기총을 탄생시키고 만 것이다.

이날 한교연 제2차 총회보고서를 통해 한기총 시절 이단아로 취급 받았던 최삼경 목사는 한교연 ‘바른신앙수호위원회(위원장, 정두근 목사)’라는 이단대책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다시 한기총을 향해 이단으로 공식 분류했다.

뿐만이 아니다. 한교연의 바른신앙수호위원회(바수위)는 과거 한기총의 이대위가 칼을 휘두를 때와 같이 이단언론 내지 이단옹호언론을 멋대로 규정하는가 하면, 기존 한기총을 포함한 대부분의 교단들을 이단으로 규정한 후, 한교연 ‘제2차 총회보고서’라는 책자에 올리는 등 나름의 불법적 행사를 서슴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지금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위법적이고 불법적이고 교만적인지를 모르고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아마 무지하기에 용감했던 것 같다.

또 한심한 것은 최 목사를 시켜 한기총과 하나 되지 않는 교단들을 이단으로 정죄, 중세 칼빈식 마녀사냥을 하게 한 후, 그를 다시 이단으로 뒤집어 씌워 이단아로 만든 후, 그를 데려와 있던 곳을 향해 또 다시 이단이라 한다면,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의 소굴임을 스스로 밝히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사실쯤은 뒤늦게라도 깨달았으리라 본다. 결국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이단 논쟁으로 말미암아 자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은 이단(異端)의 정의를 제대로 알기나 하면서 상대를 이단이라 몰아 세웠을까. 권력과 명예와 삯을 위해 자신들의 세를 불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야 했고, 죽이기 위한 수단과 구실로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단 정죄였던 것임을 이젠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다.

한 믿음 안에서 서로 상투를 틀어잡고 삯을 위해 이단 논쟁이란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다툼과 분쟁을 유발할 때, 또 그들이 제2차 총회보고서를 통해 “무서운 이단 신천지”라고 특별히 강조하던 신천지예수교의 이만희 총회장은 다툼․분쟁․전쟁 대신 1차(유럽), 2차(미주)에 이어 3차(아프리카) 동성서행(東成西行)의 역사를 이어가며 세계 대통령들과 평화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며 전쟁종식과 함께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역설해 왔다. 뿐만이 아니다. 6․25참전국들의 참전용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날의 공로와 위로를 전하는 뜻 깊은 자리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요 나라도 못하는 숙연한 자리라는 사실을 동행취재단의 후기로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 쪽이 진정 이 나라와 인류에 필요한가를 냉철한 사고로 분별할 때가 왔음을 제발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경(經)에는 삯을 위해 일하는 삯군 목자가 있고,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평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달리는 선한 목자 곧 평화의 기수(旗手)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리고 인류 평화를 위해 선한 마음으로 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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