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소방서 세종로119안전센터 소방사 유두현

‘孝(효)’에 대해 글을 써보려 하니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늘 함께 밥 먹고 대화하고 살을 맞대며 사는 가족에 대한 생각을 막상 글로 쓰려니 괜히 겸연쩍었다.

사진도 제출하려고 먼지 쌓인 앨범을 뒤적였다. 그간 잊고 지냈던 추억의 순간들이 남아 있었다. 지난 일들을 다시금 돌아보며 넘기다, 그 중 한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그 사진은 아버지가 초등학생인 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던 날의 한 장면이었다. 젊은 아버지는 자전거를 양 손으로 꼭 붙들고 있었고, 철부지 아들은 그저 처음 타보는 자전거가 좋아 즐거웠다. 괜스레 그 날의 기억으로 웃음이 나다 문득, 그 사진 속 아버지가 내가 갖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집 안에선 유독 말씀이 없었다. 당신의 자식들에 대한 교육과 육아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가족여행은 있었지만, 휴일이면 주로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당신이 갖고 있는 자식에 대한 기대나 불만도 거의 내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내게 아버지는 다가서기 힘들고 어려운 존재는 아니었지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언제나 곁에 함께하고 있는 존재란 생각 역시 들지 않았다. 당신의 일과 삶이 그 무엇보다 먼저인 분인 줄로만 생각했었다.

사춘기가 오고, 나는 공부는 뒤로 한 채 친구들과 어울려 밤거리를 나돌았다. 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그 시절, 어떠한 꾸중과 체벌도 하지 않았다. 입대 전날 밤에도 아버지는 몸 조심히 다녀오란 간략한 말과 당부의 인사만 했을 뿐, 일찍 잠자리에 드셨고, 다음 날 아침엔 늘 그랬듯 일어났을 때는 이미 출근 하신 다음이었다.

휴가를 나온 날도, 제대를 한 날도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속으로는 못내 서운하고 야속했지만 나 역시 한 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냥 타인처럼 아버지와 난 한 지붕아래서 그저 살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 감정으로 아버지를 대하며 시간은 더 지나갔다. 일 년 반 정도 소방공무원이 되고자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며 공부했고, 드디어 최종 합격의 날,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를 안아주며 수고했다는 말을 하였다.

그날 밤 약주를 전혀 하지 않는 아버지와 처음으로 술상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자리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그간 꼭 여쭙고 싶던 말이 있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뭘 하든, 나무라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으셨는데 왜 그러셨던 거에요? 화도 안 나셨어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묵묵히 술잔을 비우며 단 한마디만 하셨다. “믿었으니까.”

난 왜 처음부터 자전거를 혼자 탔다고 생각했을까. 젓가락질을 하는 것도, 웃어른께 인사를 드리는 것도, 단추를 잠그는 것도,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할 때와, 감사해야 할 때를 아는 것도. 그 모든 언행이 온전히 나에게서 비롯된 내 것이 아니었음을 왜 알지 못했을까. 당신의 자식이 수 십 번, 수 백 번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받을 때 아무 말 없이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못난이가 누구를 미워하며 살았던 것일까.

그날 난 아버지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릴 적 학교에서 알아오라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써내던 우리 집 가훈 ‘信(신)’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 어린시절 유듀현 소방사와 자전거를 태워주시는 그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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