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중략…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 불유교경 중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법문 -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후 누구에게 이를 알릴지 고심하며 7주를 보냈다. 이후 녹야원에서 함께했던 동료였던 다섯 명의 비구 콘단냐, 아사지, 마하나마, 밧디야, 바파에게 최초로 설법했다. 이들은 석가모니가 타락했다고 생각했지만 설법을 듣고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됐다.

이후 이들은 열띤 전도를 통해 마다가국에서 존경받던 카사파 3형제와 그들의 무리 1천 명 등을 귀의하게 했다. 석가모니의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주변국 왕도 놀라게 했다. 그는 거대한 힘을 갖고 있던 코살라의 왕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었던 살인자이며 악한인 ‘앙굴리말라’도 교화시켰다. 석가모니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 인접국인 바지국, 그리고 석가족의 나라를 중심으로 전도여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석가모니는 출가승의 집단생활을 도입했다. 흔히 불리는 ‘승가’가 처음 시작된 것이다. 석가모니의 승가 제도에는 특색이 있다. 출가 이전에 어떤 사회계급을 가졌더라도 출가를 한 시간이라도 빨리 한 사람이 윗자리에 앉게 했다. 계급을 무시한 평등주의를 도입했다.

승가에서 개인은 세 벌의 옷과 하나의 밥그릇만을 소유하도록 한정됐다. 기증품은 모두 승가 공동소유로 삼았다. 이들은 우기에는 한곳에 모여 반성과 학습에 전념했는데, 이를 안거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다. 승려가 출가해 수계한 이후 햇수를 법랍이라고 한다.

이 당시 불교 신도구성인 사부대중 구성이 완료됐다. 사부대중에는 비구(남성 출가자), 비구니(여성 출가자), 우바새(재가 남자 신자), 우바이(재가 여자 신자)를 뜻한다. 석가모니는 80세가 될 때까지 전도를 쉬지 않았다. 심지어는 죽음을 앞둔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르침을 받으러 나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석가모니의 유훈으로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잘 알려졌다.

입적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쿠시나가라에서 말라족에 의해 화장됐다. 몇몇 왕국 지도자들은 사리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에 늙은 사문이었던 ‘도나’라는 브라만에 의해 해결됐다. 사리를 8부분으로 나눠 자기들의 왕국에 안치하고 구조물을 세웠다. 불탑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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