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규 종로소방서 구조구급팀장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학력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이 전부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가정환경 조사서에 썼던 부모님의 학력이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아버지는 중학교 중퇴가 정답이다. 부모님의 학력이 부끄러웠는지 거짓으로 말하곤 했었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키는 작지만, 미모만큼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고, 아버님은 175의 키에 75킬로그램의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한글을 쓰고 한자를 읽어 내려갈 때는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한 아들보다 훨씬 낫다. 당신이 배우지 못한 설음과 한을 자식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고 모든 삶 자체를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에 쏟아 부었다.

더군다나 장남(2남 2녀 중 장남)에 대한 사랑과 기대는 차고도 넘칠 정도였다. 지금은 보기가 드문 풍경이지만 70년대 농촌에는 가가호호 닭 몇 마리는 키웠던 시절이었다. 동생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그 귀한 닭을 잡아서 볶아 주시던 아버지, 참고서를 산다고 하면 물어보지도 않고 주머니를 열어 주시던 아버지,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영어 선생님과 수학 선생님을 찾아다니시던 아버지가 바로 우리 아버지다. 지금도 그 생생했던 기억 속 아버지의 사랑을 되새겨 보면 부모님에 대한 사랑에 절로 가슴이 찡해져 온다.

이제 내 나이 50,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에서야 부모님 참사랑을 조금은 알 것 같아 가슴이 미어져 온다. 지금은 하루 세끼 굶지는 않는다. 생각하기도 싫은 가난 속에서도 이처럼 건강하게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닭볶음 냄새가 온 집안을 진동했을 텐데도 알면서도 잠든척했을 동생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이 공간을 빌어 전한다. 내가 조카들 생일을 기억하고 작은 용돈이라도 보내는 것은 그때의 미안한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제주소방서에 근무하던 중 삼풍백화점 붕괴를 계기로 중앙119구조단이 발족을 앞두고 전국에서 지원자를 모집했고,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한 마디로 “올라가라”며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27개월 군 생활을 제외하고는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한다는 걸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어머님, 아버님도 큰아들이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르지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아들의 등을 떠밀던 아버지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울생활이 만 17년이 지났다. 고향을 찾는 횟수는 점점 줄어든다. 소방관이라는 직업 특수성이라고는 하지만 고향 찾는 게 귀찮아진 거다. 아버지는 알면서도 비행기값이 얼만데.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자식의 마음에 짐을 덜어준다.

학교생활(사회복지과정 석사),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교수님들과 직장 선․후배, 지역사회 지인들에게 선물해야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지금도 손을 벌린다. 손수 지으신 귤을 보내준다. 선물해야 할 분들의 이름만 불러주면 아버지는 누구누구의 주소를 다 꿰고 있다. 정말이지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올 초 고향에 갔을 때 일이다. “아부지 필요할 때 씁써(사용하세요의 제주 방언)” 하고 신용카드(한도 3백만 원)를 내밀자, 아버지는 고맙다며 카드를 들고 나가시는 거다. “어디 감수 강(어디 가십니까?)”하고 묻자 “카드로 돈 찾으러 농협에 간다고~”고 말하시는 아버지. 신용카드를 사용해 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어떻게 카드를 사용하는지 모르셨던 거다. 나는 “아부지 이 카드는 물건을 사고, 돈 대신에 카드를 주면서 계산해주세요”하면 된다고 설명해 드렸고 우리 부자는 한참을 웃었다.

다른 부모님처럼 우리 아버지도 예외는 아닌 가 보다. 동네 어른들에게 우리 아들이 카드를 주고 갔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다니시는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돈으로 해결하는 거란다. 생신에 찾아뵙지 못하는 명목으로 용돈만 드리고 마는 현실에 내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한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가끔 드리는 용돈과 안부 전화가 전부다.
20여 년을 한결같이 지역사회 복지관과 요양원 등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제 친구는 평균 나이가 65세가 넘는다. 말벗을 해 드리고, 목욕봉사를 하다 보면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튼튼한 팔다리와 75킬로의 건장한 청년은 74세의 노인의 몸으로 변해 있을 거다. 지금 내가 씻겨 드리고 있는 이름 모를 어르신처럼…. 밀려오는 그리움과 미안함, 죄스러움이 한 줄기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과 함께 사라져 간다.

봉사활동을 다녀와서 전화를 드리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고 착허다이(제주 사투리) 우리 아들”하고 칭찬을 한다. 부모님에게 못다 한 효도를 봉사활동으로 대리만족과 위안으로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맞다. 효도가 한 걸음 나아가면 경로(敬老)라고 중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어버이를 공경하고 떠받는 것이 효도라면 이웃 어른이나 노인들에게까지 효도의 마음이 확대한 것이 경로다.

“사랑하는 어머님, 아버님!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못다 한 효도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못다 한 효도를 아들, 딸들이 해 당신이 우리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큰 힘이 됩니다. 손주들 재롱도 보시고, 증손주를 품에 안아 보는 그날까지, 아니 오래도록 영원히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9988234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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