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원 시인, 작곡가

귀농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허영과 환상을 가지고 오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서울서 누리던 걸 그대로 누리려고 하니 실패하기 마련이다. 정통 농사가 아니라 1차, 2차 가공농업으로 돈을 벌려다 엎어지기도 한다. 귀농운동본부의 책임도 있는 것 같다. 귀농자 강연회에도 가끔 가본다. 전우익 선생은 군것질 농사만 하는 분이다. 윤구병 선생은 나처럼 밥걱정 없이 농사짓는 가짜 농군이다. 이철수 판화가나 윤구병을 성공적인 귀농 사례로 소개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원불교 교전인 ‘대종경’에 이런 얘기가 있다. 돼지가 야위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먹이를 잘 안 먹어 보리를 주다가 입맛이 돌아왔길래 다시 겨를 주었더니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 한번 높아지면 못 낮추고, 살림살이를 늘릴 순 있어도 줄일 순 없는 게 도시의 삶이 아닌가. 집착이 너무 지나치면 야윈 돼지처럼 되는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냈으면 농촌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 하숙생 인생이 아닌가. 내가 살고 있는 뒷산 무덤처럼 말없이 저물도록 일만 하면서 오늘 하루도 보냈다. 이제 들어가자고 아내와 남편이 서로서로를 부르고 있는 풍경이 보인다. 밥은 달고 잠은 깊어만 가는 겨울 동화.

나는 세상과 이야기하려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사진작품을 만들고 있다. 죽비처럼 정신 번쩍 뜨이게 하는 시들을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으로 칼과 창으로 쓰리라. 가정은 내 삶의 진지이다. 가정에 평화가 없고, 여기서 재충전 못 하면 바깥에서 어떻게 될까. 바깥은 전쟁터인데 난 뜬구름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공부도 가정에서, 사회에서 더 잘 지내자고 하는 것 아닌가. 새가 높이 나는 것도 먹이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부부라고 해서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부부 싸움을 하는 날은,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 잎사귀가 툭툭 떨어져 나갈 만큼 부는구나.

살다 보니 슬픔도 다 지나가면 기쁨으로 변한다. 어느 순간인가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 마음공부가 뭐 별것인가. 내 안에 나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눈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말린 뽕잎과 버섯 넣어 지은 밥을 청국장에 비빈 다음, 간장고추절임을 얹어 먹는 맛이 꿀맛이다. 나의 시에서는 시골 고향의 타오르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나의 그림에서는 군부독재와 싸우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내 마음 안에는 아직도 세상적인 계산이 있고 욕심도 있다. 숲에 들어가면 잘생긴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교인들이 호의호식하는 걸 못 본다. 가난한 화가가 돈 좀 벌었다고 자랑하는 건 봐주고 싶다. 앞으로도 나는 뒷산 무덤처럼 말없이 소리 없이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싶다. 다만 내가 아프게 겪은 일, 힘겹게 산 일, 어느 것 하나를 빼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IMF 이후로 아버지를 미워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내 이야길 들려주고 싶었다. 실패한 아버지들 많은데 그들이 저 미움을 왜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하나 싶다. 선이 굵고 남성적인 힘이 넘치는 판화를 그리고 싶다. 예술로 성찰하고 싶다. 그림과 사진작품을 만들 때는 세상의 판단과 평가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도종환 시인이 정치계로 간 것은 사망 아니면 중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눔을 특별한 일로 여기고, 그걸 잘 하는 사람 칭찬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나눔 아닌가. 나눔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가 에누리없이 존재의 절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더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덜 사나워지고, 덜 욕심 내고, 쓸데없는 짓 덜하지 않을까. 밖의 평판 상관 없이 지킬 수 있는 자기 긍정이 있어야 대나무가 대나무로 크듯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다가 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동네 노인한데 ‘우리 딸 참 잘 생겼죠?' 했더니 ‘사람은 다 똑같아!’라는 대답에 한방 크게 맞았다. 지혜는 우리 곁에 무수히 지천으로 깔려 있다. 개가 짖어도 법문이라고 하듯이, 높은 지식은 없지만 몸으로 살며 체득한 달관과 초연을 농부들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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