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매거진] 고산 윤선도 ‘진도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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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Ⅵ ‘진도 사적비’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다. 이제 우리는 문학인 고산 윤선도가 아닌 정치가이자 혁신가인 고산 윤선도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보자.

 

 

백성을 위한 마음 간척사업에 담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전남 진도 굴포마을에도 고산의 흔적이 있다. 조선 건국 이래로 최초의 민간 간척사업을 일궈낸 덕에 이 마을 주민들은 대대손손 터를 잡고 밭을 일구고 있다. 그리하여 매년 정월대보름엔 마을 주민들이 사당에 모여 고산에 감사의 제를 올린다.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 획기적인 일이었다. 병자호란으로 백성의 삶은 고단했는데 이 간척지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간척지의 규모는 현재 굴포리 신동마을부터 연동마을까지 약 60만 제곱미터, 축구장 크기의 300배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현재 고산을 모신 사당은 고려시대 배중손(?~1271) 장군의 사당에 세를 든 모양새다. 겸해서 사당을 쓰는 것이 아쉬운 게 아니다. 관리가 소홀하여 사당 이곳저곳에 잡초가 무성할 뿐 아니라 훼손된 사당을 보노라니 그저 씁쓸한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사진촬영: 이승연 기자 / 슬라이드 편집: 손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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