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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Ⅳ ‘고산 윤선도 묘소와 시제’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다. 이제 우리는 문학인 고산 윤선도가 아닌 정치가이자 혁신가인 고산 윤선도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보자.

 

 

해남 윤씨 제각을 찾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매년 음력 10월 23일은 고산 윤선도 시제다. 2012년 12월 6일이 그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해남 윤씨 손(孫)들이 모여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기에 여념 없었다. 고산은 금쇄동에서 다섯 벗을 만났는데 바로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이다. 그래서인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제각과 무덤이 금쇄동에 있다-엔 눈 내리는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와 대나무, 졸졸 흐르는 시내, 바위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침인지라 어둠 내내 빛을 밝힌 달은 제 사명을 다하곤 잠시 쉬러 갔지만.

이날 고산은 손(孫)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흠향했을 터다. 그리곤 금쇄동 일대를 둘러보지 않았을까.

시제를 마친 후 해남 윤씨 종손 윤형식 옹은 “우리 전통문화를 담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전달하는 천지일보에서 고산 할아버지를 취재하러 왔다”며 반가이 맞이했다.

이날은 또한 고산의 국가 표준영정이 선보여지는 날이기도 했는데 시제를 끝낸 손(孫)들은 연동에 있는 고산윤선도기념관에서 영정 봉안식을 소박하게 치렀다. 국내 최고 화백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4년 만에 완성한 영정 속 고산과 인사드리러 온 후손의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

(사진촬영: 이승연 기자 / 슬라이드 편집: 손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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