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최근 개그우먼 이영자 씨가 자신이 진행하는 TV 프로의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고 털어놓아 화제가 됐다. 오락 프로가 시작되기 전에 우스갯소리 등으로 방청객들의 기분을 좋게 하여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을 바람잡이라 한다. 바람잡이는 대개 무명이거나 프로의 서열상 아래에 놓인 이들이 한다. 때문에 데뷔 20년이 넘는 중견 연예인인 이영자 씨가 바람잡이로 나선다고 하니 시청자들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내놓은 것이다.

원래 바람잡이는 야바위꾼이나 치기배 등과 짜고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사람을 뜻한다. 시장이나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 투전판을 벌여놓고 사람을 꾀는 것이나 사람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쏠리게 하고선 소매치기를 하는 것 등이 바람잡이의 역할이다. 

오락 프로 등에서 바람잡이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연극처럼 방송 프로 역시 관객들의 리액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가 없다. 때문에 바람잡이 노릇을 잘 하는 재주꾼이 있으면 프로의 재미를 훨씬 더 잘 살릴 수 있다. 바람잡이는 그러나 아예 출연을 하지 못하거나 출연 분량이 미미한 경우가 많다. 바람잡이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그럼에도 바람잡이를 자청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재능을 인정받고 출연기회를 잡거나 더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육상이나 스케이팅 등 레이스를 펼치는 스포츠 경기에선 페이스메이커(Pacemaker)가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 우승이나 메달을 목표로 하는 선수와 함께 달리며 페이스 조절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페이스메이커다. 완주 거리가 42.195㎞인 마라톤의 경우 페이스메이커는 대개 30㎞까지 달리고 물러난다. 같은 팀 동료들이 작전을 세워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나누기도 하지만 대회 주최 측에서 페이스메이커들을 기용해 선수들이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작년 초 개봉한 영화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 페이스메이커의 이야기를 다룬다. 가난했지만 동생의 성공을 위해 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주인공.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자 음식점 배달원으로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이어간다. 그런 그에게 다시 달릴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는 국가대표팀 페이스메이커로 나선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30㎞까지만 뛰기로 한 그가 더 달린다. 더 달려서, 1등을 먹어버린다. 황당하지만, 감동 비슷한 것이 밀려온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페이스메이커도 일종의 약속이다. 공짜로 뛰는 것도 아니다. 페이스메이커에게도 그만한 대가가 주어진다. 실제로 1등을 할 실력이면 애초에 페이스메이커로 나서지도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영화 속 세상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박수를 보낸다.
쇼트트랙이나 육상의 800미터 이상 중장거리 경기에서도 페이스메이커가 있다. 같은 팀 선수 중 실력이 떨어지거나, 실력은 있으나 동료를 위해 작정을 하고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선수가 먼저 치고 나가 다른 팀의 우승후보 선수 앞을 막고 동료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수를 말한다. 이것도 일종의 작전이랄 수 있지만, 썩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어서 그런지 페이스메이커라는 말 대신 대개 바람잡이라 부른다.

대통령을 뽑는 큰 레이스가 얼마 전 끝났다. 그 과정에서 페이스메이커도 있었고 싸움닭도 있었을 것이다.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그만 됐다 싶은 사람들은 알아서 퇴장해 주었으면 좋겠다. 페이스메이커, 싸움닭 노릇 잘 했으면 그것으로 박수 짝짝 받고 물러나면 보기에도 좋고 나라에도 좋다. 더러는 그런 사람도 있긴 했지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완주하겠다며 이를 악다무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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