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조선의 시대정신으로 ‘선비정신’을 꼽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비’하면 대쪽처럼 곧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직언 상소를 올리는 엄청난 용기와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선비다. 사회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비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 근현대기 학생 운동 등에 그대로 계승됐다.

▲ (일러스트=박선아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남명 조식, 실천 정신으로 후학 양성
중봉 조헌, 나라 위해 의병으로 나서
고산 윤선도, 글 속에 올곧은 신념 담아

[천지일보=박선혜ㆍ김성희ㆍ이현정 기자] 예로부터 비롯된 선비정신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필요한 선비정신은 무엇일까.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남명 조식, 중봉 조헌, 고산 윤선도가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통해 이들이 말하는 선비정신을 풀어가 보자.

남명 조식(남명): 나의 호는 남명이요, 이름은 조식(1501~1572)이며,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네. 오늘 이 자리에 특별한 벗들을 소개하지. 서로 인사 하시게.

중봉 조헌(중봉): 반갑습니다. 나의 호는 중봉이요, 이름은 조헌(1544~1592)인 경기도 김포 출신 나그네입니다.

고산 윤선도(고산): 제가 제일 나이가 어리군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풍류를 즐기며 살아온 윤선도(1587~1671)라고 하며, 호는 고산이라 씁니다.

남명: 그래 다 모였는가. 오느라 고생했네. 우리가 오늘 모인 것은 후대 사람들이 ‘선비정신’에 대해 물어왔기 때문이지. 쑥스럽긴 하지만 우리가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로 뽑혔으니 짧게나마 담소를 나눠봄세.

중봉: 자고로 선비란 ‘순수한 마음과 정도와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고산: 그렇지요. 제가 한 말씀하자면, 소인이 부귀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려서 높이 과거하고 젊어서는 경상에 오르는 것도 별로 구차하지 않게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의를 지켜 버리지 않았으며, 칼 갈고리에 찔리거나 가마솥에 삶기어도 이 뜻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남명: 자넨 말이 청산유수일세 그려. 맞네. 그 뜻을 굽히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선비가 가져야 할 정신이지. 자넨 어떤가 중봉~.

중봉: 무엇보다도 실천이 우선이지요. 저는 소양을 갖추기 위해 한시도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지요. 심지어 부모님 방에 불을 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산: 학문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남명: 자네들이 알지 모르겠으나, 나는 좀 다양한 삶을 살았네. 요즘 말로 하면 영어로는 다이내믹이라 하더군, 허허. 나는 성리학에만 치우치는 편협함을 못 보겠더군. 그래서 궁마 수학 병법 불교 역사 천문학 등에 관심을 두고 익혔다네. 난 이 학문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이들이 훗날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을 줬다네.

고산: 대체 그런 학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칠 생각을 어찌 하신 것입니까?

남명: 그건 부정과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이 깨어 있었기에 가능했지.

고산: 아하, 그렇다면 저도 한 말씀 드리죠. 조선 후기 문신인 권시(權諰 1604~1672)가 상소문에서 저에 대해 말하길 “온 세상 사람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못할 때 윤선도가 말하였으니, 윤선도야말로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한 과감한 선비입니다”라고 말이죠. 부끄럽습니다.

남명: 부끄럽다니, 바른 것을 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선비의 모습 아닌가. 요즘에는 이렇게도 표현하더군. 모든 사람이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외칠 줄 아는 것이라고, 허허. 중봉 자네도 이러한 상황이 있었는가?

중봉: 저는 첫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회 풍습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교서관의 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왕의 진노를 샀지요. 보은현감을 할 때에는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혀 대간의 모함에 탄핵을 받아 파직됐습니다. 그러나 곧 복직이 됐었지요.

남명: 그랬군. 나도 목숨을 내놓고 왕에게 칼같이 날카롭고 바늘로 심중을 찌르는 듯한 상소문을 올린 사람으로 꼽힌다네.

고산: 어떤 상소를 올렸습니까?

남명: 때는 어린 임금이 왕위에 올랐는데, 나이가 어려 대비가 대리청정을 할 때였네.

중봉: 혹 그것이 유명한 ‘을묘사직소’아닙니까. “(중략) 전하의 국정이 그릇된 지 오래고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중략) 대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나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어리시어 선왕의 대를 잇는 외로운 한 아드님에 불과할 뿐입니다.”

남명: 상소문의 교본이라 하더니만 자네도 들어보았구먼.

고산: 상소문을 올리신 용기가 대단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길 선비정신의 꽃은 실천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세력이 약한 남인 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이십여 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지요. 이후에도 은거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는데, 요즘에는 ‘교과서’라는 책에 저의 작품인 ‘어부사시사’가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정철 박인로와 함께 3대 가인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남명: 내 듣자하니 한시(漢詩)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글도 유명하더구먼. 장하이.

중봉: 실천이라 하면 의병으로 나선 전적을 빼놓을 수 없지요. 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이었던 이우, 김경백, 전승업 등 1600여 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했지요.

고산: 아름다운 이 강산을 우리 손으로 지키는 데 앞장섰군요.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중봉 형님은 금산에서 무슨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중봉: 맞네. 청주성을 수복했는데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네. 그리하여 불과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지. 그곳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네. 후대는 이것을 ‘금산전투’라고 말하더군. 내가 생각할 땐 대첩인데 말이야. 허허.

남명: 혹시 자네 곽재우를 아는가.

중봉: 아, 그 붉은 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며 왜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망우당 아우 말입니까.

남명: 맞네. 망우당 곽재우가 나의 선비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제자 중 하나였네. 나는 그저 나라를 구하라고 병법만 가르쳤을 뿐이네. 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중봉처럼 아무 공로를 바라지 않고 전장으로 나가 의병이 되었다네.

고산: 우리 대화를 통해 보니 ‘선비정신’이란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신념과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남명: 역시 듣기 좋게 깔끔하구먼. 문장하나는 자네가 으뜸일세. 그렇다면 후대에 맞는 선비는 어떤 이들이겠는가.

중봉: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가 되겠고, 경제성장기에는 경영자와 전문기술자가 나라를 지키고 이끌어갈 이들이 아닐까요. 선비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 즉, 지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남명: 그렇다네. 선비라는 것은 신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고, 인간의 도덕성을 확립할 수 있는 인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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