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도회, 수련회에 참석 중이거나 기도센터에 있는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각종 문제에 부딪히기도 한다. 왜냐하면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집에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사실 그는 자기가 만난 어려움과 고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외로움과 고통을 받고 우리에게도 똑같이 슬픔과 눈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계속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과 자비와 이해라는 평화의 무기가 있는 우리에게 더 이상 두려움과 절망은 없다. 우리는 자유롭다. 바로 그것이 지금 이 순간 행복이 가능한 이유다. 꽃은 우리를 위해 미소를 늘 간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가? 당신의 겉모습, 감정과 생각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라. 과거 혹은 미래의 환영이 우리를 부숴버리도록 그대로 두어선 곤란하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기도와 수행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똑바로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며 기도이다. 진정한 화해와 안전한 삶의 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집 전화와 공중전화만으로도 통신에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다. 요즘은 누구나 휴대폰을 갖고 다닌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문명의 이기에 무조건 따라가지 않고 소신을 갖고 거부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자동차 운전면허 없이 사는 일. 텔레비전을 거부하는 일, 엘리베이터 타지 않기 등등.
논리의 비약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휴대폰 없는 생활을 고집하는 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와 ‘장님의 등불’을 다시 한 번 묵상해본다. 몇 년 전 17년째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노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도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는가?” 하는 질책이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막말’이 오가고 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불편하면서 청소년들의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현상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몸을 움직여보자. 상대방의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편하면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 마음도 편하게 해 준다. 눈빛을 좋게 비추어 보자. 상대방을 사납게 노려보지 말자. 사람을 대할 때도 얼굴빛을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해보자. 말을 품위 있고 부드럽게 하자.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며 평화의 상태로 변하게 한다. 저승에 가면 그 사람이 이승에서 쌓은 업보를 비추어 본다는 ‘업경대’라는 거울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 ‘업경대’도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의 양심이요 무의식이다. 무의식이 밝으면 그 사람의 머리 뒤에 뜨는 아우라가 훤하다. 업이 많으면 아우라가 시커멓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들을 묘사할 때는 머리 뒤에다 둥근 아우라를 그려 넣는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인기가수 남훈의 노래다. 그동안의 고생 기간이 끝나고 새해부터는 좋은 일들이 날마다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늘 깨어 기도하자. 기독교에서 ‘십일조’가 중요한 덕목이듯이, 불교에서도 ‘보시’가 6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에 들어간다. 보시라고 하는 첫 관문을 열어야만 나중에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빈부격차가 커지는 한국 사회에서도 기부가 중요한 사회적 덕목으로 대두되고 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적선(기부)을 많이 하면 반드시 잘 된다는 것. 우리나라에서 500년 이상 지속된 명문가의 후손들을 만난 결론이 ‘기부’라는 비결이었다. 연말연시에는 서로 나누고 베풀고 함께하는 사랑의 실천을 우선 나부터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