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서일본 장악한 오우치家 시조는 성왕 아들 임성태자
일본에 남겨진 백제왕 후손, 1400년 만에 조상을 방문하다

▲ 백제왕가 임성태자 45대손 오우치 씨 부부. 백제의 옛땅인 익산시 능산리 2호분에서 임성태자의 아버지 성왕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제공: 익산시청)

“1400년의 역사 속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족보를 통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한국이 그리워졌습니다. 이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조상님께 반드시 성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지난 6월 8일 KBS ‘역사추적’은 자신들을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한 일본인 부부의 한국 방문 이야기를 다뤘다. 지난 4월 17일 백제의 옛 땅인 익산시를 방문한 이 일본인 부부는 오우치 기미오(69, 남편)와 오우치 다카꼬(65, 부인) 씨. 이들은 1400년 전 일본으로 건너 왔다는 백제왕족 임성태자(琳聖太子)가 바로 자신들의 뿌리라고 소개했다.

공항에서 한국 취재진과 짧은 인사를 마친 오우치 씨 부부는 먼저 임성태자의 아버지인 성왕(聖王)의 무덤인 능산리 2호분을 찾았다. 이날 인근 문화원에서 제공한 백제왕의 옷으로 갈아입은 오우치 씨는 성왕에게 참배한 뒤 “아득히 먼 아버지 백제왕의 묘 앞에 머리를 대고 왕의 혈손 45대 후손 오우치 기미오 삼가 아룁니다”라며 “수많은 세대를 거쳐 그리고 수많은 세월을 지나 드디어 대망의 조상의 땅에 지금 돌아왔습니다”는 내용의 제문(祭文)을 읽었다.

제를 끝낸 뒤 그는 “조상님들께 참배하는 소원을 이뤄 기쁨과 흥분으로 가슴이 북받쳐 오른다”는 소감을 밝히고 “임성태자가 일본에서 보여준 업적을 소중히 하며 자랑스런 백제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대대손손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조상과의 극적인 만남을 마친 오우치 씨는 미륵사지와 백제왕궁리유적지를 둘러보고 성당포구마을에서 농촌체험을 했다. 이어 18일에는 보석박물관, 함라 돌담길, 웅포곰개나루 등을 관람하는 등 조상의 나라를 경험했다.

오우치 씨 부부가 한국에 오게 된 배경은 20년 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족보 때문이었다. 족보에는 임성태자가 오우치 가문의 시조로 기록됐다. 이때부터 한국을 찾겠다는 열망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곳에 서서 조상님이 보았던 바로 그 경치와 산을 보며 조상님이 사랑했던 곳에 서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20년 동안 그토록 바랐던 소망을 이룬 오우치씨는 전북 익산 원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그 감격을 전했다.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백제왕에게 성묘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20년 동안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학생들에게 오우치 씨는 자신도 백제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높은 긍지를 갖고 있으며, 조상 땅을 방문했을 때 여러 감회에 젖었다고 말한 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오우치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사이에 점차 이 아이들과 제가 한 조상 아래 태어나 같은 DNA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인쇄소의 디자이너로 일하는 오우치 씨는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자신의 재산 일부를 정리해 마련한 돈 3000만 원을 문화재 관리에 쓰라며 익산시와 부여군에 기탁하고 한국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무리했다.

임성태자의 후손 일본을 호령하다

임성태자를 시조로 모시고 있는 오우치 가문은 14세기 황량했던 야마구치를 1만 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일본 최대의 도시로 건설했던 명문가이다. 이들은 중국과 조선을 상대로 국제무역을 독점해 부를 축적하는 등 일본 전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4세기 서일본의 대표적인 봉건국가였던 야마구치에 수도를 세우고 200년간 서일본을 호령했던 오우치 가문의 관저는 동서남북 길이가 200미터에 달해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관저를 규모면에서 압도한다.

오우치 가문은 당시 일본 서부 지역의 스오, 나가토, 토요타 등 7개국을 지배했는데 이는 오늘날 후쿠오카현, 시마네현, 와카야마현, 오사카 일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해당한다. 오우치 가문은 한때 이 힘을 바탕으로 당대의 실세였던 쇼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1338년부터 1573년까지 영주들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무로마치 시대에 오우치 가문이 특별히 강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뱃길을 통한 국제무역의 독점이 있었다. 1978년부터 오우치 관저터에서 발굴된 중국 명나라와 조선의 동전 9만여 개를 비롯해 고려 청자, 조선 백자 등 다량으로 발견된 무역품은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기타지마 다이스케(야마구치시 역사박물관) 관장은 “(오우치 가문의) 세력이 강성해진 배경은 강력한 군사력을 하나의 요인으로 들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힘이었다”고 말했다.

오우치 가문은 또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도와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조정으로부터 무역독점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백제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한 임성태자

임성태자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 ‘코류사’라는 절에는 그가 직접 사용했다는 유물 세 가지인 칼, 피리, 관모가 전해진다. 특이한 점은 유물 가운데 칼이 한쪽날로 제작된 일본도와는 달리 양날의 형태이며,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은상감 기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칼의 제작연도를 측정한 결과 7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분석돼 임성태자의 상륙 시기와 맞아떨어지고 있다. 또 ‘진부쿠사’라는 절에 있는 목조11면 관음상 역시 임성태자가 전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그가 실존인물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임성태자의 출현은 이미 고대 일본 설화에서 예견됐다.

야마구치현 구다마쓰시의 한 사찰에는 “스이코 3년(595년)에 하늘에서 큰 별이 소나무에 떨어져 7일 밤낮으로 빛났다”는 기록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이는 “앞으로 3년 이내에 백제라는 나라에서 임성태자가 온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야마구치현 호후시 향토자료문화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서 또한 ‘스이코 5년(597년) 오우치의 시조인 백제국 임성태자가 이곳 해안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임성태자의 역사적 사실성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역사서에 따르면 백제를 출발한 임성태자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호후시에 있는 타타라 해안. 이곳에서 그는 아직 철의 이용방법을 모르는 일본 사람들에게 백제의 선진문화였던 제철기술을 전파했다. 이 때문에 야마구치현 곳곳에는 일본 최대의 제철 유적지가 발견되고 있다.

임성태자는 이곳 타타라에서 2년을 거주하다가 오우치로 이주했다.

그의 후손들은 8대손 정항(正恒) 때 임성태자의 상륙지점 명칭을 따라 성씨를 ‘타타라’씨로 칭했다가 16대손 모리후사 때에 이르러 거주지 지명을 따라 ‘오우치’씨로 변경했다.

오우치 기미오는 “백제에서 건너온 왕자가 타타라 해안에 도착했을 때, 제철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말로 타타라는 제철을 뜻하므로, (임성태자는) ‘타타라’라는 성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임성태자가 일본에 전해준 것은 제철기술뿐만이 아니다.

불교와 민간신앙이 융합된 형태인 묘견신앙(칠성신앙)도 일본에 전파했다. 묘견신을 섬기는 도쿄의 묘견궁(妙見宮) 벽화에는 임성태자가 백제에서 거북이를 타고 대한해협을 통과해 일본으로 건너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임성태자를 가운데 두고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의 슬퍼하는 모습과 일본인의 기뻐하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게 특징이다.

조상의 뿌리를 찾아 한반도를 찾은 후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임성태자가 일본에서 크게 부각된 이유는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려는 오우치 가문의 열성 때문이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임성태자의 25대손 오우치 요시히로는 1395년부터 해마다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친서를 보냈다. 특히 정종 1년 때 보낸 친서에서 그는 “저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저의 세계(世系)와 성씨를 알지 못하오니 이것을 자세히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자신이 백제왕족의 후손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오우치 가문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에 정종은 오우치 가문을 백제왕족의 후손으로 인정하고 왕족에 대한 예후로서 그에게 토지 300결을 하사하려고 했으나 ‘외국인에게 땅을 줄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오우치 가문과 조선왕조의 교류는 150년 동안 200회가 넘을 정도로 활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확인 요청은 63차례나 될 정도로 끈질겼다.

그때마다 조정이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역사서에 임성태자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역사서는 임성태자를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로 기술하고 있으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첫째 아들인 위덕왕과 둘째인 혜왕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부여 능사절터에서 출토된 사리함의 명문에는 성왕에게 공주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가 성왕의 모든 자녀를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전문가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왕권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기 때문에 왕가의 모든 구성원을 기록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왕권 계승에서 밀려난 임성태자는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게 판단돼 삼국사기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제 26대 임금인 성왕은 도읍지를 부여의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신라와의 동맹으로,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을 76년 만에 되찾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2년 만에 배신한 신라에 의해 한강을 다시 잃어버린 후 신라 매복군에게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성왕의 죽음 이후 백제왕가는 심각한 내분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598년 위덕왕이 죽은 이후 혜왕, 법왕, 무왕에 이르기까지 왕이 세 번이나 바뀌는 등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기를 맞았다.

역사전문가는 임성태자가 성왕이 피살된 슬픔에다 왕가의 정치적 혼돈이 겹치면서 그 도피처로 선택한 것이 일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비록 정치적 망명지로 택한 일본이었지만 임성태자는 그곳에서 항상 백제를 그리워했다. 그의 영향으로 일본에는 한반도식 기와와 조선식 궁궐 등 고국에 대한 향수가 묻어있는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의 핏줄을 타고난 영향일까, 임성태자의 후손들은 일본에서 지금도 백제의 땅을 그리워하고 있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오우치 기미오 씨는 임성태자의 공양탑에서 “저희들은 이번에 시간을 초월하고 대를 거듭하여 드디어 조상의 묘에 태자의 마음을 가지고 방문하여 성묘했습니다”라고 고했다.

그는 “백제는 우리들을 통해 계속해서 숨을 쉴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한국에서 가져 온 백제의 흙을 공양탑 아래 정성껏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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