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록야학 박용준 교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상록야학서 문학 가르치며 20년간 교사로 봉사
문학 동아리 ‘글동지’ 결성해 학생과 소통 시도

[천지일보=김성희 기자] “상록야학에서 공부하고 난 후 ‘나도 이곳에서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모교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교사로 봉사한 것이 20여 년이 흘렀네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상록야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박용준 교사는 구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1989년 상록야학을 알게 된 후 3년간 공부를 해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패스했다.

“어려서 크게 다친 적이 있어 운동은 일절 하지 않았어요. 커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돼 서른 즈음 자연스럽게 공부에 취미를 갖기 시작했죠. 못 배운 것이 한이 된 것도 있었고요. 공부하다 보니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됐어요. 그래서 나와 같은 사람이 많으니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사로 활동하게 됐어요.”

어릴 적 집안이 가난했고 동생도 6명이나 되는 집안의 장남인 박 교사는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장남이니 공부보다는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뜻도 저버릴 수 없었다.

야학에서 검정고시를 패스한 후 당시 서울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전공했다. 원래 박 교사의 꿈은 소설가였다. 박 교사는 1995년 이후 6~7년간 꾸준히 신춘문예출품도 했었다. 지금은 후학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고향 서산에서는 글짓기대회도 나가곤 했어요. 친구들 펜팔 편지도 써줬었죠. 한 여학생하고는 250통이 넘는 편지도 주고받았어요. 소중한 추억이라 아내에게도 버리지 말라고 했죠. 언젠가는 소설로 써보고 싶어서요.”

야학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박 교사는 그의 선배이기도 한 졸업생들이 3호까지 발간하고 중단된 교지편집을 맡아 5호부터 발간하고 있다. 또 글동지 동아리도 운영한다.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배우고자 하는 야학 학생과 졸업생이 모여 글을 쓰고 문학기행을 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야학과 달리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상록야학은 검정고시 패스만을 위한 공부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해볼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한다.

“공부만 하는 건 굳이 야학에 오지 않아도 학원이나 평생교육원 등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우리 야학은 학창시절에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활동을 직접해볼 수 있도록 운영하려고 해요. 수학여행도 다녀오고 백일장도 해보면 가정에 가서 자녀와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교권이 무너진 요즘, 상록야학은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스승에 대한 존경도 눈에 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이 초롱초롱하다. 또 ‘스승의 그림자는 밝지도 않는다’는 옛말처럼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

혹여 집에서 맛있는 음식이라도 한 날이면 선생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가져와 몰래 책상에 올려두곤 한다. 요즘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사제간의 정이 느껴진다. 박 교사가 상록야학에 20여 년 이상 몸담을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제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야학의 특성상 저녁 6시 이후 매인 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주는 가족과 직장동료도 큰 힘이 됐다.

“20년 이상을 직장생활과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은 동료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처음 야학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도 직장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줬어요. 가족도 많은 도움을 줬죠. 낮에 활동할 수 없는 야학의 특성상 저녁 시간과 주말에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 어려워요. 그러니 가족행사나 친구모임은 제 스케줄 위주로 잡아주죠.”

박 교사는 야학으로 인해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귀가도 늦고 함께 여행을 가거나 자녀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며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아내와 두 자녀는 박 교사의 봉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묵묵히 지켜봐 주는 최고의 후원자다.

이렇듯 많은 이에게 배움의 기회와 소통의 장이 되고 있는 야학이 점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사회에서 도움의 손길도 많았다. 하지만 정책이 바뀌면서 후원을 하는 사람들이 세제혜택이 가능한 곳으로 옮기면서 수백 곳에 달하던 후원처는 이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지금은 교장선생님의 고정 후원금과 구청이나 서울시에서 도움을 주는 것 외에는 후원이 거의 없어요. 선생님들이 조금씩 모아 활동비에 보태기도 해요. 또 예전에는 학생에게 돈을 받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야외활동을 나가거나 할 때 식비 정도는 지참하도록 하죠.”

현재 상록야학에 필요한 것은 이사 걱정 없이 고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다. 수백 곳에 달하던 야학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이유는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상록야학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상록야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책걸상 같은 기자재나 건물 등을 지원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선생님들은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야학이 없어진다면 참 아쉬울 것 같아요. 야학을 거쳐 간 5천여 명 마음의 고향이 없어지는 거니까요.”

지난 2010년 8월경 졸업생을 중심으로 동문회관을 건립하기 위해 작게나마 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올겨울은 유난히 날씨도 추운데 당장 기름 한 통 사기도 빠듯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예전과는 달리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요. 하지만 기억력이 살아 있고 가능하다고 느껴질 때까지는 봉사할 거에요.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학생 입장도 생각해야 하니 하고 싶다고 다 할 수는 없죠. 마음 같아서는 70살까지도 단에 서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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