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현 용산구청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있다. 아니, 아들은 주로 고기를 먹고 아버지는 고기를 굽고 자른다. 아들이 문득 고개를 들어 고기 한 번 먹어보라고 재촉하면, 아버지는 잠시 멈추고 기름이 대부분이거나 타버린 고기를 재빨리 한 점 집어든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들은 잠시 울컥해질 것이다. 내 아버지도, 내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아이 앞에서 아버지는 고기를 굽는 사람, 고기를 자르는 사람이다. 그건 자자손손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이다. (광수생각, 2012) 중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나에게 가슴 울컥한 그리움이다. 구청장으로 당선되기 6개월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이다.

아버지는 하루 세끼 끼니조차도 제대로 해결 못할 만큼 가난을 대물림해 받은 농사꾼으로 태어나 소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셨다. 일제시대부터 8.15해방, 6.25한국전쟁 등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80평생을 그저 ‘콩 심어야 콩이 나고 팥 심어야 팥이 나는’ 줄 아는 순박한 마음으로 땅을 파고 사셨던 분이다.

젊었을 때는 지독한 애주가셨지만 내가 중학교 입학하는 날부터 좋아하시던 술을 끊으셨다. 어려운 살림에 7남매를 키우기 위해 삼베옷 입고 고무신 신고 사셨지만, 아들 넷은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키셨다.

못난 아들이 서울 용산에서 최연소로 구의원에 당선돼 고향을 찾았을 때 우리 부부의 큰절을 받으신 아버지께서는 “이제 너는 내 아들이기 이전에 용산 사람들의 아들이 되었으니 내 말 명심해 듣거라. 어쩌다가 니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말이다. 돌아 댕기다가 다리가 아픈께 쉬어갈라고 니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이여. 절대로 돈 욕심 갖지 마라.”고 공직자로서의 바른 길을 신신당부하셨다.

두 번의 구의원 임기를 마치고, 민선 2기 구청장에 출마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합동유세장 한쪽에 앉아 아들의 유세를 끝까지 들으시고 서울에 남아있으면 선거에 도움이 못되고 짐만 된다며 또다시 서둘러 밤기차를 타시고 내려가셨다.

그렇게 선거를 치르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 서울 한복판 구청장에 그것도 최연소로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너무 좋아하면 마가 낀다’고 크게 소리 내어 기뻐해 보지도 못하셨다.

구청장으로서의 임기를 채 마치지도 못하고 야인 생활을 하는 나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나를 지켜봐주셨다. 그 말없음이 얼마나 큰 부모님의 사랑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2009년 11월 23일, 배가 아프시다고 병원에 검사받으시러 가셨다가 만 하루 만에 유언 한마디 없이 84세를 일기로 먼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나는 민선 5기 구청장으로 용산에 돌아왔다. 6개월만 더 사셨어도, 아니 넉넉잡고 7개월만 더 사셨어도 나의 당선과 취임식을 보셨을텐데…. 당선이 되고 나서, 나는 아버님의 산소 앞에 당선증을 올려놓고 한없이 울었다.

“나는 말이여, 아무런 욕심도 없다. 호강하고 싶은 욕심도, 논밭 많이 가질 욕심도 없어. 그런디 꼭 한가지 소원은 말이여, 나가 중시조 소리는 한 번 들어야 것는디. 느그덜 덕분에 말이여. 나는 그 욕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해마다 11월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만큼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아버지가 몹시 그리워진다. 살아계셨을 때 잘 모시고, 잘 돌보아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나도 어느새 장성한 두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문득 책속의 ‘자자손손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이라는 그 말에 코끝이 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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