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는 그야말로 흉흉하고 끔찍하다. 거기에 한몫 하는 게 있다면 소위 ‘묻지 마 사건’들이다. 이유도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얻어맞고 죽어 달라. 이것이 이 시대에 마치 유행처럼 번지며 영화보다 더 리얼하고 잔혹한 거리의 공포로 자리 잡고 있다.

작금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한국․일본․중국․러시아․호주․미국 등 국적을 불문하고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젊은이가 어른을, 어른이 젊은이를 때리고 찌르고 쏘고 있다. 사실 그 중심에는 젊은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인류가 함께 고민하며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니, 그 원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마디로 인간성의 상실이 가져온 ‘인명경시 풍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연역적으로 얘기해 보자면 ‘인간성 회복운동’이 시급하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이 인간성을 회복해야 하는 데는 그 첫걸음이 바로 종교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라고 봐진다. 종교의 본질은 바로 ‘생명’ 내지 ‘생명 존중’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생명을 말하지 않고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논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종교의 본질이자 인류최고의 가치인 생명, 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평화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평화가 깨지므로 인류는 혼란의 늪에 빠지게 되고 생명존중은 요원한 얘기가 되고 만다.
결국 오늘날 인명 경시 풍조는 생명존중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 종교가 그 본연의 길에서 이탈해 탈선의 길을 걸은 데서 기인된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인류가 태동하면서, 그 바탕위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인간은 문명을 일으켰고, 그 문명은 다시 문화를 이루며 삶의 의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신(神)과 함께 종교를 탄생시켰고, 비로소 종교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종교문화가 곧 인류의 문화라 할 정도로 온 인류를 지배해 왔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가 그 종교의 본질과는 무관한 길을 걸어온 결과가 바로 오늘날 나타나는 생명 내지 생명존중의 필요조건인 평화를 해치는 진원지가 되는 모순을 낳게 됐다는 점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평화가 깨지므로 화합과 상생은 요원해져만 가고, 인류는 물고 뜯고 싸워야만 했으며, 그 결과로 인명경시풍조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종교이고 평화를 빼놓고는 자기 종교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나 오늘날이나 다툼과 전쟁의 원인은 바로 종교에 있었음을 지나온 인류 역사가 정확히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종교는 이대로는 아니 되고 다시 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세상에서도 ‘종교가 살아야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는 충고의 말이 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오늘날 젊은이들의 탈선에 대해 우리 기성세대 또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학교의 책임․부모의 책임․정부의 책임 등 책임 전가에 전념할 게 아니라 우리 기성세대 어른의 공동의 책임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최고․성장․성공․돈만이 전부라 생각하는 우리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이 오늘의 이 무서운 세태를 탄생시켰다는 뼈저린 각성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우리 언론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사실 인정해야만 한다. 법과 도덕을 질타하고 청소년 폭력과 범죄를 우려하면서도 선정성과 폭력성 등의 광고물과 기사를 앞다퉈 다루는 이율배반적 태도는 언론부터 각성해야 한다는 원성을 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이제 부탁하고 싶은 것은, 금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제발 종교를 권력유지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고, 또 종교는 권력의 하수인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제 맡은 자리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인간존엄의 사조와 인류최고의 보편적 가치가 인정받는 가정․조직․학교․사회․나라 더 나아가 인류를 만들어 가는 데 최우선을 다해 줄 것을 다시 한번 주문한다. 이 사회 이 나라만큼이라도 기본이 서고 인정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그 터 위에 성장도 발전도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 흉흉한 이 사회를 바로 잡고 정화해 나가기 위한 첩경은 종교가 화합과 상생의 철학으로 다시 나서 인간성을 회복시킬 때만이 ‘묻지 마’가 아닌 ‘물어 보는’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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