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 그 남루한 경(經)

김교한(1928~  )

내일은 미풍이 불까 서성거린 잿빛 고목
아낌없이 떨구고 있는 그 앞에 다가서니
왜 이리 잊히지 않는 잔상(殘像)이 허공을 맴도는가

휘청한 가지 끝을 저녁노을 찍고 간다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어진 줄 모르는 날
시간을 다 풀어놓고 남루한 경 내놓는다.
 

 

 

[시평]
오랜 풍상으로 이제는 고목이 된 나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떨군, 그리하여 이제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아니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어진 그 사실조차도 모르는 그러한 고목.
시간은 이렇듯 편안한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란 이렇듯 잔인한 것인가.
휘청한 가지 끝, 저녁노을 찍고 가는, 그러한 시간. 이제 시간을 다 풀어놓고 남루한 경 내려놓듯이, 오랜 시간 견디어온 고목, 나뭇잎 하나 ‘툭’ 하고 떨어뜨리는구나. 이 지상, 지상의 어딘가로.

윤석산(尹錫山) 시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