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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유난히 좋아하던…
포근했던 엄마 그리워

나의 어머니는 ‘바를 정(正)’자를 참 좋아하셨기에 우리 집 가훈은 ‘正’이었다.

신발 정리도 가지런히, 옷장에 옷도 상, 하, 속옷, 양말 따로따로 가지런히 책상위의 책도, 행동도, 말도, 걸음걸이도 반듯해야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

윗사람에 대한 예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 이 모든 것이 몸에 배도록 교훈을 심어 주셨던 어머니. 그 옛날 핸드폰, 전화가 없었던 때 나와 어머니의 소통은 문에 바르는 종잇조각에 할 말씀을 써서 밥풀로 벽에 붙여놓는 게 지금으로 말하면 소통이었다.

제 기억으로 어머니는 60년대 군 소재지에서 부인회장을 하셔서 이승만 대통령 때 경무대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방문 하셨던 기억도 난다.

어려서부터 꿈과 희망을 심어주셨던 나의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
“큰 애야…….”
“김 선생…….” 부르시기에 “어머니,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라고 하면 “아니다. 너는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러야 한다”고 늘 말씀 하셨던 어머니.

네 자매 맏딸인 나에게 부모님을 대신한 가정에 모든 일에 결정권을 많이 부여해 주셨기에 동생들에게는 하늘이었고 부모님보다 맏이인 나를 어렵게 생각하도록 하신 것도 지금생각하면 나에 대한 기대감과 큰 사랑임에는 틀림없으셨다.

나는 내 직장에 최선을 다하고 내 아이를 기르느라 바쁘게 효를 잊은 채, 30~40대를 지난 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초등학교 교직 생활을 하면서 100일을 속옷은 흰색, 겉옷은 흰색과 검정색을 입고 생활할 때 동료들도 감동을 했고, 주위의 모든 분들이 쉽지 않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부모님에 대한 아주 작은 ‘효’라고 생각했다.

그 해 어버이날은 왜 그리 허전했는지…. 창경원 벚꽃은 유난히 활짝 피어 꽃을 좋아 하시던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올라와 꽃구경하던 그 옛날이 그리웠다.

지금도 보고 싶은 어머니! 이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맞춤형 삶을 사셨고 지혜로우심과 나눔을 몸소 실천하셨던 어머니의 뜻 깊은 교육열을 잊을 수가 없다.

시골 집 장독대 옆에 늘 심어놓으시던 채송화, 봉선화, 분꽃, 백일홍을 볼 때마다 어머니 모습을 보는듯하고, 포근했던 엄마의 품이 그립다.

날마다 엄마의 냄새를 맡고 싶다.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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