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대선전에 뛰어들었다가 사퇴한 안철수의 생각은 무엇일까? 앞으로 그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서진이 심각한 내분으로 멸망한 후 중국의 북방에서는 ‘5호 16국 시대’라는 혼란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요장(姚萇)은 지금의 섬서, 감숙, 영하, 산서 일부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에서 강(羌)족의 후진(後秦)을 수립했다. 요장은 한족 지주들을 임용하고 부정부패와 가혹한 통치제도를 철폐했으며, 형벌을 정비하고 근검과 절제를 제창했다. 또한 학교를 세우고 충직한 사람들의 간언을 받아들였으며, 문치를 중시하고 덕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다. 전진(前秦) 이래 혼란에 빠졌던 관중은 활력을 되찾았다. 요장은 명성도 실력도 그리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군웅들이 난립하던 시기에 한쪽 지방에서라도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모략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강 건너 불보기(隔岸觀火)’를 이용하여 얻은 승리였다.

요장은 선비족인 전진의 부견(符堅)이 가업을 일으킬 때 뛰어난 무공을 세워 양위(揚威) 장군이 되었다. AD 383년 부견이 동진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자 부융(符融)을 비롯한 조정의 실력자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선비족 모용수(慕容垂)와 연합한 요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립할 생각으로 장강을 건너 오월 지역을 병탄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군사력을 믿고 있던 부견은 반대를 물리치고 원정군을 일으켰지만 비수에서 사현(謝玄)이 이끄는 동진군에게 대패했다. 전진의 주력부대는 궤멸했지만 모용수와 요장의 부대는 온전히 살아남았다. 모용수는 부견을 낙양까지 호위하는 도중에 반란군과 연합하여 형양(滎陽)에서 자립을 선언하고 연(燕)을 세웠다. AD 384년, 모용수는 20만의 병력으로 업을 공격했으나 동진군과 연합한 부견의 아들 부비(符丕)의 공격을 받자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모용홍(慕容泓)은 패전 소식을 듣고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華陰縣)으로 이동했다. 모용홍이 부하에게 피살되자 모용충(慕容沖)은 전진을 잇달아 격파하고 장안의 서북쪽 아방성(阿房城)에서 서연(西燕)을 세웠다.

이 무렵 부견은 요장과 아들 부예(符叡)에게 모용홍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부예가 모용홍에게 피살되자 죄가 두려웠던 요장은 위북(渭北)으로 도주하여 자립했다. 요장이 자립했을 때 모용충은 전진의 두충(竇沖)을 격파하고 모용홍과 합쳤다. 그가 모용홍의 암살에 개입했다는 설도 있다. 모용충은 황태제의 자격으로 모용황을 황제로 추대하고 백관을 설치했다. 당시에 전진은 요장을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전진과 소모전을 전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요장은 모용충과 연합하고 조용히 정세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아들 요숭(姚崇)을 인질로 제공한 그는 북지로 이동하여 군사력을 비축했다.

예상보다 빨리 결과가 나타났다. 모용충이 장안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견은 포위를 풀고 회군했다. 요장은 전진과 모용충이 싸우는 동안 새로운 곳을 확보했다가 두 세력이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 다시 장안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전략은 잇달아 성공했다. 그동안 장안성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던 전진과 모용충은 모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385년 5월, 모용충이 다시 장안을 공격하자 친히 독전하던 부견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도피했다. 그물을 치고 기다리던 요숭은 부견을 사로잡아 선양을 강요하다가 거절하자 살해했다. 모용충은 가볍게 장안을 점령했지만, 전진의 관리들은 대부분 요장에게 투항했다. 장안을 점령한 선비족은 요장의 예상대로 내분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다가 동쪽으로 이동했다. 요장은 힘들이지 않고 장안을 점령했다.

요장으로부터 안철수의 다음 행보를 짐작한다면 무리일까? 5년 후의 그가 궁금하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