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 문화재는 내가 지킨다’ 서울 서대문노인대학 정봉환 주임강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서대문 문화재는 내가 지킨다’ 서울 서대문노인대학 정봉환 주임강사

仁王(인왕): 인자한 호랑이, 仁旺(인왕): 일본왕
일제 치하에 만들어진 단어 배경 젊은 층도 알아야

서울 서대문지역 무악재, 통일되면‘ 평화로’ 될 수도
4년 전 만든 원고… 교재 완성 후 해설사 양성할 터

[천지일보=최유라 기자] “서울 서대문지역 이야기는 밤새도록 얘기해도 다 못 할 만큼 할 말이 많은데, 지금 서울 사는 사람들조차 내가 하는 이 얘길 아는 사람은 드물끼라.”

지난 10월 23일, 서울 서대문노인대학에서 교양과목 담당 주임강사인 정봉환(74) 옹을 만났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을 물어보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시인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정 옹은 대한노인회 숲생태 지도자, 향토문화재 해설위원을 겸하면서 유구한 우리네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산 증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제 치하를 겪고, 강산이 일곱 번 바뀔 동안 정 옹은 젊은이들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 젊을수록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역사적인 탄생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옛 도성 명칭 속 숨은그림 찾기

1392년 조선 건국해. 이성계는 도성을 계룡산에 지으려 했다가 계획을 변경했다. 무학대사, 정도전, 하륜 중 정도전의 제안이 수락돼 북한산을 뒤로 한 지금의 서울에 도성이 세워졌다. 정 옹은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도성을 세우기 위해 정도전이 부여한 세세한 의미를 설명했다.

정 옹은 칠판에다가 커다란 원과 그 안에 작은 원을 그렸다. 안쪽 원은 내명당, 바깥 원은 외명당이라고 한자로 적어 내려간다.

“내명당은 백악산(북)을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낙산(동), 남산(남), 인왕산(서)을 포함한 범주 내를 말하고, 외명당은 북한산(북), 용마산(동), 관악산(남), 덕양산(서)을 포함한 범주 내를 말해. 외명당은 내명당을 보호하는 외곽이야.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고려해서 도성은 북한산을 배산(背山)으로 두고 한강을 앞에 둔 거지.”

정 옹은 정도전의 지혜를 놀랍다며 극찬하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유교사상이 짙은 정도전은 도성 곳곳에 인간의 근본 도리인 오상(五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심어 놨다.

이 오상은 문 이름에 각각 새겨있다. 동대문의 다른 이름인 ‘흥인지문(興仁之門)’에 인(仁)이 들어있는 형식이다. 이처럼 서대문에는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에는 ‘숭례문(崇禮門)’으로도 부른다. 북대문은 실질적인 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북서쪽에 있는, 현재의 상명대학교에 앞쪽 문에 ‘지(智)’를 넣어 ‘홍지문(弘智門)’이라고도 불렀다.

나머지 신(信)은 도성 중간의 있는 ‘보신각(普信閣)’에 들어있다. 이는 유교신앙이 사회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밖에 정도전은 도성의 색깔과 사신(四神) 간의 관계에 대해, 동쪽은 청용(靑龍), 북쪽은 현무(玄武), 남쪽은 주작(朱雀), 서쪽은 백호(白虎)로 정했다. 도성의 동남서북 순은 춘하추동으로 정해졌다.

“도성 구성엔 다 의미가 있어. 오상(五常)의 의미를 담은 문 중엔 흥인지문만 네 글자다. 왜냐. 그 쪽 땅이 좀 질었거든. 언덕도 좀 낮았고. 그래가 정도전이 ‘갈 지(之)’ 자를 하나 넣어서 보충한기라.”

◆ 축이 있는 도성… 산맥 정기 집합장

정 옹은 일제시대 때 잘못 전해오는 명칭을 끄집어내 지적하기도 했다.

“인왕산. 인자한 호랑이라는 뜻에서 ‘인왕(仁王)산’이었지. 근데 일본이 ‘인왕(仁旺)산’으로 한자를 바꿨어. 일본의 왕이라 이거지.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우리가 인왕(仁旺)이라 쓰고 있다는 거야.”

정 옹은 아직까지 일제 치하 흔적이 남아있다는 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정 옹은 서울 도성을 한 축으로 기준을 삼아 조선을 세우고자 했던 정도전의 도성 건물의 배치도를 산맥을 가지고 설명
했다.

그에 따르면, 도성은 북쪽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북한산, 남쪽 지리산에서 올라오는 관악산의 정기를 이어받기 위해 ‘북한산-경복궁-광화문-황토현-숭례문-관악산’ 순으로 곧게 건축됐다.

단, 불이 나면 줄줄이 전소할 수 있기에 사이사이에 연못, 황토재를 만들었고, 각 궁궐 네 귀퉁이마다 드무(물을 담아둔 그릇)를 설치했다.

현재의 곧은 태평로도 당시엔 없던 길이다. 화재 진압시간을 끌려고 광화문으로 곧장 갈 길을 보신각을 거쳐 돌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 옹은, 서울 도성 중 ‘무악재’가 남북통일이 되면 중요한 입지로 부상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무악재는 사신(使臣)들이 왕래했다 해서 연행로(燕行路), 의주로(義州路), 사행로(使行路)라 불렀다. 통일로(統一路)라고도 부르는데 통일이 되면 평화로(平和路)라 하겠지….”

현재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는 무악재는 안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다. 신라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우고자 북한산을 오를 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위해 개성(고려 수도)에서 이삿짐을 짊어지고 내려올 때, 또 사신이 왕래할 때 다닌 길이라는 점에서 무악재는 매우 유명하고 중요한 길이다.

이 같은 역사적 문화재에 대해 정 옹은 젊은이들이 서울 도성에 대한 역사만큼은 꼭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일제 치하 때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고 북한산에 말뚝을 박은 일본, 남산에 세운 신사참배 등….

그는 앞서 서대문구청에 ‘서울 도성 문화재’ 교재를 만들어 달라고 건의까지 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 말 나온 지 4년이 넘도록 깜깜무소식이다.

“4년 전에 현동훈 전 서대문구청장이 책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내가 인사말까지 다 넣고 원고를 준비했는데 언젠가 말이 쏙 들어가 버렸어. 서대문을 중심으로 서울의 역사적인 기록을 책으로 만들면
그걸로 문화재 해설사를 한 20명 양성하는 게 내 꿈이야.”

서울 은평문화재 해설사로 있을 때도 그곳의 문화재 교재를 직접 만든 정 옹. 이제 그는 서대문의 주산(主山)인 ‘안산’에 대한 책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지금 한류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하는 젊은이들의 활약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어주기 위해선 무엇보다 수도의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뒷받침돼야 더 훨훨 날 수 있지 않느냐며 정 옹은 끝까지 역사의 힘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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